Green Othello

All About Othello

ballzzang wrote this on 10/21/2015 00:24 in 오델로, 소설, X-square, 망아지

망아지 (3)

현서는 노인의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지만 마음은 오히려 평온했다.

떨리긴 했지만 두렵지는 않은, 적절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반드시 이겨보리라 하는 마음도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저 저 할아버지를 대상으로 자기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방으로 들어갔더니 노인은 금빛 오델로판을 놓아둔채 그 앞에 앉아있었다.

'이 할아버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건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밤이구나. 난 네가 포기하고 안오는줄 알았다. 헐헐”

“전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에요.”

“그래, 좋구나. 오늘도 네가 지면 다시는 기회는 없다, 알고 있지?”

“네”

“둬보자. 얼마나 실력이 늘었을지. 오늘도 백을 쥐겠지?”

“아니오. 흑”

노인의 눈썹이 잠깐 치켜 올라갔다.

“흑이라고 했나.”

“네”

노인은 묘한 미소를 짓더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좋다. 둬보자. 이번엔 내가 백이다.”

현서는 백열등이 멀겋게 빛나는 옥탑방 안이 가득차도록 심호흡을 크게 한번 했다.

현서의 손이 중앙의 백돌을 뒤집었고 노인은 바로 직각으로 응수했다.

다섯번째 흑의 수에서 대각으로 뒤집으면 로즈 진행이 나오게 된다.

학원에서 많이 보아왔고 익숙한 모양이다. 그 길로 가면 지난번과 같은 진행이 된다.

익숙함이 과연 좋은 것일까.

'네가 믿고 두는 곳이 제일 좋은 수라고 생각하고 둬. 그게 곧 너의 최선수야.'

현서는 아까 민혁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흑돌을 손에 꼭 쥐었다.

'내가 믿고 두는 나의 최선수!'

현서의 손은 C5가 아닌 C4로 향했다.

“이건... 홀스(Horse)!'

노인이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노인이 다음 수를 놓자 현서는 판을 뚫어지게 굽어보았다.

'보인다! 내가 두고 싶은 나의 자리가!'

현서의 손길이 빠르게 오델로판을 오갔다.

척척 놓는 현서의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 기세에 노인도 잠시 주춤했던것 같다.

'이 녀석... 무언가 깨달은건가'

노인의 손이 점차 굼떠지기 시작했다.

지난번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현서가 놓는 자리는 정확히 대립의 급소가 되는 곳들이었다.

흑이 한번 상대를 가르면 백이 다시 가르고 나왔다.

서로의 일합 일합이 부딪히면서 만들어진 흑과 백의 팽팽한 대립.

40수가 넘어가면서 흑과 백은 서로 불균형변 하나씩을 가지고 있었다.

흑의 끼워넣음을 유도하는 수에 백이 반발하면서 좌변은 흑이, 우변과 하변은 백의 세력권이 되었다.

'형세는 팽팽하다. 여기서 다음 수가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자리.'

현서는 차분히 생각했다.

'G3? 이곳은 잘라 놓은 대각이 방어가 돼... D2? 저기는 내 수를 죽이는 곳인데... 그렇다면...'

현서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먹이 위를 빙빙 도는 독수리와 같은 눈빛으로 판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현서의 눈이 잠시 크게 떠졌다.

'여기다! G7의 엑스!'

흑돌이 G7에 놓여지자 중앙에 뭉쳐있던 백돌들이 홍해가 갈라지듯 흑돌로 갈라지고 말았다.

흑이 화이트라인을 점령하면서 백은 할 수 없이 블랙라인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고 그곳은 흑돌에 의해 이미 대각이 잘려진 곳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현서는 오로지 판에 집중하면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현서는 앞에 누가 있는지는 잊고 그저 자신이 두고 싶은 곳을 수계산 하면서 두는 것에만 몰입되어 있었다.

한편 흑이 엑스스퀘어를 놓고 형세가 기울어지는 그 순간부터 노인의 눈에는 현서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초록색 들판의 이쪽과 저쪽을 힘차게 뛰어다니는 망아지 한마리가 보였을 뿐이다.


다음날 오후.

잔잔한 가을 햇살이 한빛 오델로 학원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을 무렵 학원의 문이 덜컥 열리면서 현서가 들어왔다.

강의 교재를 정리하고 있던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 현서 왔구..응?”

지수는 인사를 꾸벅 하고는 무언가 위풍당당하게 지수 앞을 지나쳐가는 현서의 모습에 잠깐 의아했다.

현서는 학원 한켠에서 오델로판에 놓아보고 싶던 기보를 늘어놓고 있던 카이에게 다가갔다.

“카이 형, 한판 두자.”

카이가 고개를 들어 현서를 바라보았다.

“오호~ 웬일이냐 꼬마. 먼저 대결 신청을 하고. 오늘은 자신 있나보지?”

“글쎄, 둬보면 알겠지.”

씨익 웃으며 대답하는 현서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무언가 예전같지 않음을 느낀 카이도 더 이상은 가벼운 웃음을 흘리지 않았다.

“좋아. 흑백은 네 맘대로 해.”

현서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구리에 끼고 있던 황금 오델로판을 꺼내들었다.

“뭐냐 그건.”

“우리 아빠 유품. 여기다 둬보자.”

“오~ 이거 꽤 값나가는 물건 같은데. 오케이.”

현서는 잠깐 헛기침을 하더니 자리에 앉고는 흑으로 첫수를 뒤집었다.

카이가 직각으로 받자 현서는 다시 간밤의 Horse오프닝으로 진행했다.

“응? 이건 너 아직 안배운 오프닝일텐데.”

카이가 현서가 둔 곳을 응시한채로 말했다.

“에. 이것도 오프닝 이름이 있어?”

옆에서 보던 지수가 말했다.

“응. 이건 Horse라는 오프닝인데. 내가 아직 안가르쳐준건데. 이거 네가 따로 연구한거야?”

“아니. 그냥 내가 두고 싶은 곳을 두는 것뿐인데요.”

“흐음...”

카이가 진지해진 표정으로 한수한수를 두어나갔다.

현서는 흑돌로 여지없이 백돌의 이쪽 저쪽을 가르고 다녔다.

“하아...”

카이의 신음소리가 점차 잦아졌다.

현서는 미동도 없이 꼿꼿이 앉은채로 계속 두어나갔다.

40여수가 넘어갈 무렵 카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시작했다.

“아아 이거 뭐야. 너 간밤에 무슨 약 먹었냐. 갑자기 왜 이리 잘둬.”

옆에서 대국을 지켜보던 지수도 놀란 표정으로 현서의 얼굴과 오델로 판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이 아이, 하루아침에 실력이 이렇게 늘은건가!'

흑이 C스퀘어쪽에 덤의 공간을 만들면서 패스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59수째와 60번째 흑이 연달아 백돌 8개를 뒤집었더니 35:29 흑의 승리였다.

“앗싸~ 내가 카이형을 이겼다!”

현서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카이는 마지막 엔딩 부근의 돌 몇개를 들어내고 혼자 다시 둬보기 시작했다.

“현서 축하해! 많이 늘었는걸! 카이 수준에 근접했어!”

지수가 웃으면서 얘기했다.

“거봐 내가 곧 카이 따라잡을거라고 했잖아.”

“아 유사범님.”

언제 왔는지 민혁이 다가오면서 현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현서. 많이 성장했구나. 전국대회에서 좋은 결과 나오겠다.”

“뭘 이정도야 기본이죠. 헤헤”

그 때 민혁의 눈에 황금 오델로판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현서야 저거 어디서 난거냐!”

갑자기 상기된 표정으로 묻는 민혁의 기세에 잠시 주춤하던 현서는 장난감 할아버지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얘기를 들은 민혁은 아무말 없이 급하게 학원을 뛰쳐 나갔다.

항상 느긋하던 민혁의 모습만 보아오던 학원 안의 세 사람은 처음보는 민혁의 다급한 모습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옥탑방 앞에는 커다란 가방 하나를 두고 마지막 짐을 정리하고 있는 구부정한 모습의 노인이 보였다.

“스승님...!”

짐을 정리하던 노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유군인가.”

노인을 바라보는 민혁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간 어찌 지내셨는지...”

“나같은 떠돌이야 뭐 그냥 하루하루 끼니만 때우면 그것으로 잘 지내는 것이지 뭐 있겠는가.”

“그랬군요...”

“그 꼬마가 이야기했나보군.”

“네...”

“자네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인줄은 미처 몰랐네.”

“제가 많은걸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스스로 터득하게 도와줄 뿐...”

“최7단의 아들이니 아무래도 껄끄러울텐데. 용케 잘 지내고 있나보구먼.”

“....”

“이야기 안해도 되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노인은 옥상 한켠으로 다가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민혁도 말없이 노인의 옆에 다가섰다.

“...저 아래 많은 집들이 보이는가. 난 저 많은 집들을 보면서 결국 사람의 인생이란 다 비슷비슷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네.”

“....”

“같은 집은 하나도 없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다보면 결국 다 비슷비슷하거든.”

노인이 담배 한모금을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누구나 저마다 비밀이 있게 마련이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

“결국 인연이 있으면 만나기 싫어도 만나게 되어있고, 다 자기 업보 아니겠는가.”

민혁은 잠자코 발아래 펼쳐진 집들의 지붕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오델로로 얽힌 인연들도 마찬가지겠죠...”

“그렇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야 그 꼬마에게 깨우침을 줬으니 이제 또 떠나야지. 이로써 업보 하나는 없앤 셈이네 허허.”

민혁이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스승님께서 일부러...”

“아니야. 내가 진거야. 이미 중반에 내가 밀렸어. 엔딩에서의 실수야 모르겠지만 그 녀석 지 애비를 똑 닮았어.”

“자기가 두고 싶은 곳이 지 애비가 쓰던 오프닝 바로 그거라니. 뼛속에 뭐가 들어있는게지. 허허허”

노인은 놓여있던 가방으로 다가갔다.

“이리 주시죠.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아닐세. 자기것은 자기가 해결해야지. 내가 그 꼬마에게 가르친것도 그거거든. 스스로 하는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거들겠다는 민혁의 손을 뿌리치며 걸어가던 노인이 갑자기 뒤돌아보며 얘기했다.

“참, 그 꼬마녀석. 장차 우리나라 최고수가 될지도 몰라. 그런 느낌이 드네.”

“아직은 망아지지만 훗날 훌륭한 말이 되어 질주를 하겠지. 내 테스트를 통과한 세번째 인물이니까.”

“자네와 최군 다음으로 말일세.”

민혁은 잠시 쓸쓸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럼 또 봅세.”

정류장으로 향하는 노인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민혁은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떠나는 노인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떨어지는 낙엽들이 세월에 나부끼는 사람들의 삶처럼 그렇게 노인의 등 뒤에서 나부꼈다.

-망아지 끝-


**약속대로 세계대회 떠나기 전 망아지 편을 마칩니다.

세계대회에서 돌아오면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세계대회 참가기가 올라오게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무엇을 경험하는지에 따라 몇편으로 나눠지게 될지 모르겠군요.

소설속의 현서처럼 저도 무언가 깨달음을 얻고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격려와 응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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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델로 소설가, 공인 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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