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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zzang wrote this on 09/19/2016 11:01 in 오델로, 소설, X-square, 세 가지 스승

세 가지 스승 (8)

톡톡 떨어지던 빗방울이 이내 추적추적 도시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바람을 몰고온 그 가을비는 낙엽과 함께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빗속을 헤치고 뚜벅뚜벅 걷던 한 사나이가 최신식 빌딩 앞에 서서 잠시 건물 위를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우산을 접고 들어가 엘레베이터 앞에 섰다.

'이런 최신식 건물에...?'

엘레베이터 안에서 잠시 무슨 생각을 하다가 12층에 내려선 사나이 앞으로 한 청년이 다가왔다.

새하얀 피부에 무테 안경을 쓴 그 청년은 웃는 낯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매우 날카로워 보였다.

그의 빙글빙글 웃는 표정은 어찌보면 웃는다기 보다는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위장을 한 표정 같은 것이었다.

“유민혁 사범님 이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쪽입니다. 저희 스승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앞서 안내하는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민혁은 슬쩍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런... 벌써 읽혀버린건가...'

'두뇌훈련,집중력 개발'이라고 크게 쓰여있는 문을 밀고 들어가자 큰 강의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강의실 위에는 오델로 판이 몇개 놓여져 있었으며 그 주위로 한명의 여자와 학생이 앉아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민혁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목례를 했다.

단발의 여자는 깡마른 체구에 가늘고 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단정한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너무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 사람이 아니라 로봇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반면 또 한명의 학생은 중1정도 되어보이는 체구에 돗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히죽히죽 웃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

민혁은 슬쩍 그들을 쳐다보면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청년이 안내하는대로 원장실 문앞에 서있었다.

똑.똑.

노크를 하고 청년이 문을 열자 커다란 원장실 안에는 중년의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이곳저곳 주름살은 있었지만 하얀 눈매만은 매의 눈처럼 반짝이는 남자였다.


“이여~ 유사범 어서오게. 이게 얼마 만인가 그래. 허허허.”

남자를 바라보는 민혁의 눈매는 사나웠다.

“이 사람, 아직도 나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는겐가. 그게 벌써 언제적 이야기인데. 허허.”

“그 새 이런 훌륭한 학원사업을 하시는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잠시 입을 비쭉 내밀던 남자는 이내 너털웃음을 지으며 청년더러 나가라는 손짓을 하고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웃는 낯의 청년은 잠시 눈을 반짝이더니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허허. 사람 일이란게 다 그렇지 뭐. 이리와서 앉게.”

마지못해 맞은편 소파에 앉은 민혁을 향해 남자는 고개를 내밀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내가 옛날에 제안한대로 자네가 해주면 이런건 일도 아냐. 원장자리 하나 정도는...”

“부당하게 사는 것은 원장님 한명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혁이 말을 잘랐다.

남자는 잠시 민혁을 쏘아보더니 다시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이 사람. 세월이 흘렀어도 성미는 여전하구만. 좋아 그래. 하지만 너무 그렇게 차갑게 굴면 사형인 내 체면이 구겨지는데.”

“사형 사제 관계는 이미 오래전에 끊어진거 아닌가요?”

남자는 한동안 아무말 없이 민혁을 쏘아보았다.

“... 본론이나 말씀하시죠.”

민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하자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한숨을 내뱉으면서 말을 꺼냈다.

“좋아. 뭐 솔직히 얘길하자면 하나 부탁을 하고 싶어서 이리 와달라고 했네.”

“....”

“밖에 있는 저 친구들을 봤겠지. 저 3명은 내 수제자들인데 이번에 세계대회에 함께 나가기로 했어.”

'....?”

“이번 전국대회 4강 안에 들면 세계대회 참가자격이 주어지잖아. 뭐 그 정도야 나랑 내 제자들 실력상 문제가 안되지만 하나 걸림돌이...”

다음에 나올 말을 알겠다는 듯 민혁의 입꼬리가 살짝 실룩였다.

“뭐 그래. 바로 자네야. 자네가 이번 전국대회에 나올거라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자네가 끼면 골아파져. 4명 중에 한명이 떨어져나갈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민혁이 물었다.

“뭐... 눈치 챘겠지만 자네가 이번 출전을 포기해줬으면 하네. 사례는 섭섭치 않게 할게. 듣기로는 자네 제자들도 몇명 출전한다고 하던데 그건 뭐 제자 100명을 내보내도 상관 없고...”

“제가 그런 제안을 수락할거라고 생각하셨는지?”

남자는 담배를 다시 한모금 빨면서 말을 이었다.

“뭐... 수락을 쉽게 하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나랑 제자들이 세계대회 우승을 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라고 생각하거든. 그러면 학원이 더 커지면서 번창하겠지. 흐흐흐. 이게 내 계획이라고.”

“여전하시군요.”

“이봐, 내가 한 때 일본 강자들과 칼을 겨루던 흑왕 강태산 9단인걸 잊었나? 한동안 승부의 세계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그건...”

“추악한 이미지가 잊혀질 때까지 기다린거겠죠.”

남자가 화가난 듯 담배를 비비면서 끄더니 갑자기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그래그래 뭐 좋도록 생각하라고. 근데 자네가 아직 모르는게 있어.”

“뭡니까 그게.”

“자네가 출전해도 4강안에 못들 수도 있어. 내 제자들은 이미 내 수준에 근접했거든. 난 자네가 망신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얘기해주는 것이기도 해.”

민혁은 잠시 눈썹을 치켜 올렸다.

“밖에 있는 녀석들 중에서 제일 어린 놈은 엔딩의 귀재야. 12칸 엔딩을 푸는데 거의 실수가 없어. 그 계산력은 스승인 나 조차도 고개를 젓게 만들지.”

“...”

“그리고 여자애는 수학과 학생인데 모든 오프닝의 최선수를 다 통달하고 있는 친구라고. 끝으로...”

“저 청년은 카이스트 출신 연구원인데 초중반 엔딩까지 실수가 없어서 우리사이에서는 인간 제브라라고 불리우고 있지.”

민혁은 카이,지수,현서를 잠시 떠올렸다. 민혁은 그들을 믿고 있었다.

시합은,승부는 또 다른 세계이다. 기술과 승부는 비례하지 않는다. 

“대단하군요. 하지만 너무 자만하지 않는게 좋을겁니다.”

민혁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민혁의 시큰둥한 대답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던 남자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가보군.좋아.내 제안을 하나 하지.”

“...여기서 나와 한판 두고 지는쪽이 출전을 안하는걸로.”

민혁은 처음부터 예상했다는 듯이 씨익 웃어보였다.

“추잡한 제안을 했을때부터 그런 결론이 날거라고 생각했었죠.”

“그래? 알았어. 어이! 판이랑 돌을 가지고 오라고.”

남자가 밖에다 대고 소리를 치자 청년이 예의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오델로 판과 돌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청년의 뒤를 이어 여자와 학생도 들어와 민혁과 남자의 주변에 섰다.

“이게 전설의 유민혁9단과 얼마만에 두는거냐 흐흐흐. 기대된다 기대돼.”

남자가 탁자에 놓여 있던 안경을 끼고는 돌을 정돈하며 킬킬댔다.

민혁은 아무말없이 자신의 앞으로 돌을 가져다 놓았다.

갑자기 번개가 번쩍하더니 쿠르릉쾅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돌연 남자가 흑으로 첫수를 두었다. 민혁이 얼결에 직각으로 받자 남자는 타이거 오프닝 이후 F6으로 꺾었다.

민혁은 노쿵 아니면 컴오쓰 오프닝을 검토중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민혁은 F3으로 컴오쓰 오프닝을 선택했다. 이후 수순은 서로 연구되어있다는 듯 일사천리로 두어졌다.

번개같이 두어지던 오델로판은 잠시 민혁의 손끝에서 멈춰섰다.

심각한 표정의 두 남자가 두는 판을 옆에서 지켜보는 청년은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고 여자는 무표정이었으며 학생은 히죽히죽 거리고 있었다.

흑이 40여수 즈음에 G7 엑스스퀘어를 찔러가자 민혁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이 느낌은...'

민혁은 갑자기 알 수 없는 함정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수 자체로는 아직까지 쌍방에 문제가 없었지만 무언가 상대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듯한 느낌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상대가 아무 말 없이 첫수를 둔 것도 수상했다. 여느 때 같으면 돌을 가리자고 하는 것이 룰이었다.

'혹시...?'

민혁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빙글빙글 웃는 남자와 무표정한 여자 히죽거리는 학생이 주변에서 관전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흠...'

한동안 턱을 손에 받히고 생각을 하던 민혁의 착점은 B2 엑스스퀘어였다.

그 순간, 빙글거리면서 관전하던 청년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그는 하지만 곧 씨익 웃으면서 슬그머니 관전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갔다.

원장이라는 남자가 담담하게 A1 코너를 취하고 나서부터는 이후 엔딩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흑돌과 백돌의 얽히고 섥힌 공방 속에 어느덧 64칸이 거의 다 메워져가고 있었다.

마지막 3칸을 남겨 두고 민혁은 다시 한번 돌갯수를 헤아려보았다.

'-4, -6,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역시 그랬던건가...'

민혁의 손길이 할 수 없이 나머지 한칸으로 향했다.

쿠르릉 쾅쾅 천둥이 다시 한번 도시를 강하게 때리고 있었다.

-세가지 스승 (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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