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 Oth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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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zzang wrote this on 09/02/2017 22:06 in 오델로, 소설, X-square, 승부의신

승부의 神 (2)

심판위원장이 1라운드 페어링의 시작을 알리자 여기저기 흩어져 앉은 100여명의 참가선수들 시선이 일제히 중앙 전광판을 향했다.

"1라운드에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지수가 현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하라는거죠?"

"아니, 그건 당연한거고... 승패를 생각하지 않는게 좋아."

지수가 답하기 전에 옆에 있던 카이가 끼어들었다.

"잉? 승패를 생각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너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기보를 남기겠다, 그것만 생각해."

현서의 물음에 지수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카이형하고 사범님은 어려운 말만 해... 어, 떴다. 1라운드 페어링!"

페어링이 뜨자 갑자기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탄식 비슷한 소리들도 흘러나왔다.

"자 어차피 상대들은 우리를 잘 몰라. 편하게 두자. 현서야 파이팅."

지수의 말에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자신의 번호가 쓰여져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카이의 앞에는 얼굴이 둥근, 가무잡잡한 피부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30대 중반 정도 되어보이는 그 남자는 너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분위기만은 꽤 진지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백인거 같군요."

"네 제가 흑이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카이가 멋적게 인사를 했을 때 1라운드 대국 개시 선언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는 잠시 침을 꿀꺽 삼키더니 첫수를 놓고 초시계를 눌렀다.

남자는 바로 대각으로 응수했다.

'호오... 이렇게 되면 나의 전문 분야인 스네이크 오프닝으로...'

카이는 속으로 조짐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5번째 수를 F7에 놓으면서 스네이크 오프닝을 선택했다.

상대도 한치의 망설임이 없이 최선으로 응수했다.

'이봐, 나는 독사 카이라고. 내게 스네이크로 맞붙으면 재미 없을텐데.'

카이가 척척 응수하면서 오델로판의 절반 정도가 채워졌을 무렵, 상대가 갑자기 장고하기 시작했다.

'이 부근에서 장고 하는거 보니 이 남자도 이 오프닝을 좀 연구 했나보네. 여기가 기로이긴하지...'

카이가 상대방의 다음 착점을 기다리면서 슬몃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쪽 1시 방향에 지수의 뒷모습이 보였고 왼쪽 10시 방향으로 현서의 앞모습이 보였다.

'잘들 두고 있나... 응? 현서 표정이 왜 저래! 저 바보가... 뭐 잘못된거 아냐?'

카이의 눈에 현서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들어왔으나 그것이 어떤 상황이든 본인이 알아서 극복할 수밖에 없다.

'대회란 그런 것이지. 본인 혼자의 힘으로 싸우면서 승리든 패배든 감내해야 하는 냉정한 전쟁터. 현서야 잘 이겨내라...'

카이가 고개를 흔들며 본인의 판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상대가 손을 죽 내밀더니 B7 엑스스퀘어에 두는 것이 보였다.

'어라? 거기는...!'

그 수를 본 카이는 하마터면 소리를 내지를뻔 했다.


'아 이 아저씨 뭐지... 도무지 판에 집중을 할 수 없어.'

현서는 앞에 앉은 아저씨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았다.

50줄은 되어보이는 상대는 그의 듬성듬성한 머리털처럼 허술한 수를 두고 있었으나 문제는 초시계였다.

'탁! 탁!'

흑을 쥔 상대의 로즈빌 오프닝을 현서는 타메노리 오프닝으로 잘 받아내고 있었지만 상대는 한 수 둘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초시계를 크게 두번씩 치는 것이었다.

'이 아저씨가 또...'

상대의 그런 대국 태도는 현서로 하여금 온전히 판에 집중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끙... 귀를 막아버릴까...'

그럭저럭 50여수 정도 두어졌을 무렵 흑이 G7 엑스를 찔러왔다.

그 수를 본 현서는 패리티를 잘만 유지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는 B1으로 한 수 늘리는 수가 있지...'

현서가 착수를 마치자 흑은 장고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흑이 패리티를 빼앗는 수는 없을것 같고... 하지만 깊게 생각할 상황은 아닌것 같은데... 왜 이렇게 오래 생각을 하지. 이 아저씨 이러다 시간패 당하는거 아냐...?'

현서는 상대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보기위해 초시계를 슬몃 쳐다보았다.

"어?!"

초시계를 바라본 현서는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백을 쥔 현서쪽의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던 것이다.


빙글빙글 웃으며 한수 한수 두어가고 있는 상대를 보며 지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 아주머니 꽤 쎈거 같긴한데... 그렇다하더라도 어려운 장면에서 고민 없이 이렇게 빨리 착점이 가능한가...'

흑을 쥔 지수가 로즈 오프닝을 가지고 까다로운 길로 유도했을 때에도 상대는 별 고민없이 속기로 일관하고 있던 것이다.

"음? 음."

40대 후반은 되어보이는 아주머니는 가끔 콧소리를 내며 몇초간 지수의 수를 들여다보다가 척척 응수를 하는 식이었다.

'강하다...!'

40여수 정도 두어지고 지수가 G2 엑스를 찔러갔을때 거의 노타임으로 반대쪽을 두는 것을 본 지수는 어떤 확신이 들었다.

'이 아주머니... 이 길을 알고 있어...! 내가 유도한 그 길이 본인도 즐겨가는 길이었으려나...'

지수는 잠시 팔짱을 끼고 판 전체를 굽어보았다. 로즈 오프닝의 달인으로 불렸던 지수였지만 이 정도 수순까지 최선으로 따라붙은 상대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여기서 끝까지 최선으로 간다면 33대 31로 흑이 질 가능성이 있어. 어딘가에서 변화를 줘야하는데 이 아주머니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지수는 장고 끝에 슬그머니 하변 C스퀘어를 밀고 들어갔다. 그 곳은 최선은 아니지만 무승부가 나는 차선 길이었고 상대의 응수에 따라 이후의 수순이 상당히 복잡해진다.

'서로 모를만한 길로 가자. 엔딩에서 승부를 보는거야.'

지수가 지긋이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반상을 노려보자 상대가 슬몃 미소를 짓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에고... 이 아가씨가 승부수를 멋지게 던지시네...후후"

상대의 가느다란 눈이 갑자기 날카롭게 빛났다.


아침 햇살이 창가를 툭툭 건드리고 있을 때 한 손에 커피잔을 쥔 민혁이 가만히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쯤 1라운드 중이겠군... 모두들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미소를 짓던 민혁이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살짝 한모금 마셨다.

쌉싸름한 커피의 맛이 입안에 퍼지자 민혁은 커피 맛이 꼭 그날의 기분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민혁이 우산을 펴들고 건물을 빠져나올 때 건물 정문 앞에 서있던 청년이 다가오면서 소리쳤다.

"유민혁 사범님! 도대체 왜죠?"

민혁이 고개를 돌리며 뒤를 돌아보자 강원장의 수제자라고 하는 청년이 우산도 쓰지 않은채 항의하듯 서있었다.

"아 자넨가... 이유는 자네도 잘 알텐데?"

청년은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왜 이기는 길을 마다하고..."

"드로길을 갔느냐 이건가."

"...네."

민혁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오델로를 왜 좋아하지?"

민혁의 뜬금없는 질문에 청년은 적잖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왜 좋아하느냐고 물었어."

단호한 민혁의 표정에 청년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을때의 쾌감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승리를 즐긴다는 말인가?"

"그렇죠. 승리하지 않는 대국은 의미가 없습니다."

민혁이 아무말 없이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가자 청년도 말없이 따라 들어갔다.

민혁은 따뜻한 커피를 한잔 주문하더니 앞에 앉은 청년을 보며 가만히 말했다.

"난... 드로(무승부)가 있어서 오델로를 좋아하지."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가 이 말을 이해하게 됐을 때는 이미 세계적인 고수가 되어있을지도 모르지."

청년은 점점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변하고 말았다.

둘 사이에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 민혁이 입을 열었다.

"좋아.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지."

민혁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오델로 어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켰다.

"최선을 다해서 두어 보라고."

그 모습을 보던 청년은 이내 씨익 웃더니 대답했다.

"저는... 강원장은 예전에 뛰어넘었습니다. 그 분은 잘 모르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나도 알아. 그 정도는."

"어떻게 아신다는거죠?"

"내가 드로 길로 갔을때 이미 어떻게 끝날지 알고는 관전을 그만두더군. 그 길까지 연구가 돼있는 수준이면 강태산9단 정도는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지."

"역시 전설의 유민혁9단 답군요. 그럼 제가 사범님과의 대국을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잘 아시겠네요."

민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걸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스마트폰 화면에 첫수를 두었다.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두 남자의 진지한 스마트폰 대국 모습을 보고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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