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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zzang wrote this on 08/01/2015 00:56 in 전국대회, 참가기

볼짱의 전국대회 참가기 (2)

뭐든지 처음 하게 되면 익숙치 않은 낯선 상황에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승부를 가리는 대회에 첫 참가니까 당황하다가 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아직 오델로 대회 참가 경험이 없는 분이라면 첫 참가 시 볼짱이 겪은 일을 겪게 될지 모르므로 새겨 두는게 좋을 수 있겠다.

볼짱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크게 3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초시계의 사용이다. 이것은 그냥 누르기만 하면 되니까 작동법이 어렵다거나 잘못 다뤄서 문제가 생기는 일은 사실 거의 없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초시계를 가지고 아무하고나 연습대국 한번 하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작 첫 참가자에게 초시계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나나 상대가 깜빡하고 안누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안누르면 상대가 생각하는 시간에 내 시간이 흘러가고 상대가 안누르면 그 반대다.

상대가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 초시계의 내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걸 보게 되는 순간을 상상해보라.

정말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둘째, 기보 작성이다. 모든 대회가 기보 작성을 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전국 선수권대회는 필수로 하는 모양이다.

이게 힘든 이유는 한 수 둘 때 마다 먹지로 된 기보에 숫자를 기입해야하는데 처음 몇수야 어떻게 한다 쳐도 몇십수 흘러가면 지금 이게 몇수째인지 상대가 몇수째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거기다가 후반부에 패스라도 나오면서 홀수 짝수 순서가 바뀌면 더욱 머리속이 어지러워진다.

일단 한 수 두고 오델로판이 아닌 다른 곳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자체가 다소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다.

집중력을 흐트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어쩌면 이것이 제일 중요할 수 있는데 오프라인에서 하는 대국이다.

스마트폰 어플로만 두던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탁자위에 오델로 판을 놓고 거기에 큼지막한 흑백돌을 뒤집으면서 둔다는게 여간 어색하고 낯선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판이 한 눈에 안들어오는 탓에 흑과 백을 뒤집어가다보면 어디가 최선수인지 어디가 악수인지 판단은 커녕 내가 뒤집을 수 있는 곳과 없는 곳 찾기에도 급급해진다.

급기야는 상대 돌이 뒤집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곳이어서 뒀는데 둬놓고 보니 뒤집어야 하는 경우마저 생긴다.

그러니까 대회 참가 전 오프라인에서 충분한 대국 경험을 갖는 것은 필수라고 할 수 있다.

볼짱은 1라운드 중학생 고수를 앞에 두고 이 당황 3종 세트를 동시다발로 겪고 말았다.

백을 쥔 내가 초시계를 먼저 누르고 대국이 시작 됐는데 그 학생은 별 표정 없이 익숙한 몸 동작으로 한 수 두고 초시계 누르고 기보에 적는데 볼짱은 한 수 두고 초시계를 누른다음 판을 내려다보다가 아 기보 적어야지 생각이 들어 다시 볼펜을 손에 쥐고 기보에 숫자를 기입했다.

그 와중에 상대가 두면 상대가 어디 뒀는지를 살펴보고 또 기보에 적고 나서 그제서야 내가 둘 곳을 생각했다.

이게 익숙해지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될 일들이지만 처음 겪는 사람에게는 영 어색한 일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수가 잘 보일리가 없다. 뭘 어떻게 둬야하는지 모르게 머리속이 새하얘졌다.

'내가 돌이나 제대로 뒤집고 있는걸까. 이러다가 시간패를 당하든 퍼펙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든 사단이 나겠어... 큰일인데.'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질 때 지더라도 끈덕진 무엇이라도 보여줘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없이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볼짱은 최대한 침착하려 마음을 억지로 안정시키며 불안불안 하지만 한수 한수 버텨내고 있었다.

수계산이 제대로 안되는 상황에서 변으로 먼저 빠지다가 실수라도 나오면 큰일이니 최대한 중앙에서 버티는 수들을 두면서 상대 선수를 슬몃 보게 되었다.

'아 이 학생은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경험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지만 그 학생은 완전한 포커 페이스였다.

무심한 듯한 표정 속에 한수 두고 옆테이블 대국도 흘깃 보고 오델로 판도 아니고 볼짱도 아닌 어정쩡한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 모습 속에서 나는 한층 더 불안함을 느꼈다.

어쩌면 나와의 대국이 수준차가 많이 느껴져서 대국이 심드렁해진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이 아닌 감정이 없는 로봇하고 두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더 이상 불안에 떠는 것도 그 당시 볼짱에게는 사치였다.

주어진 시간안에 승부를 내야했고 주변에는 나를 도와줄 그 무엇도 없다.

오로지 나 혼자의 힘으로 이 주어진 상황을 헤치고 결과를 봐야한다.

그래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물어뜯어보자. 승부의 결과는 그 다음이다.

그 와중에 옆 테이블에서는 영구님과 수님의 대국이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난 내 코가 석자라 옆 대국을 쳐다볼 여유조차 없었지만 간간히 수님의

'이잉' '음' '앗'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박빙의 대국이 펼쳐지는 모양이었다.

뭔가 발랄하게 두는 것이 수님의 장점이었지.

"으음."

영구님의 표현에 의하면 수님에게는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특유의 소리가 있단다.

보통 저런 소리는 승착을 둘 때 나는 경우가 많다.

본인도 모르게 나오는 소리일 테지만 그런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수님이 이길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도 잠깐 했던 것 같다.

나는 여러가지 문제로 심각했지만 옆테이블의 그런 분위기는 얼마간은 내 경직됨을 풀어주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바로 옆테이블에서 자주 보던 사람들의 대국이 벌어지고 있는 건 불행중 다행스러운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윽고 엔딩에 접어들 무렵 볼짱이 엑스스퀘어에 들어가야 하는 찬스가 왔다.

사실 찬스라기 보다는 거기 밖에 둘곳이 없었다는 것이 맞다.

상대가 끼워넣으면 나는 그대로 패배한다. 그런데.

'아... 이건!'

볼짱은 속으로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까지 수읽기를 하고 둔 것이 아닌데 그전에 둔 수로 인해 정말 운좋게 씨스퀘어에 볼짱돌이 꿋꿋이 하나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 돌 하나가 상대의 끼워넣기를 정말 교묘히 방해하고 있었다.

'이건... 승부가 되겠다!'

태어나서 오델로 돌 하나가 그렇게 고마울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시간을 슬쩍 보니 몇분의 여유가 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상대도 시간을 오래 쓰기 시작했다.

무언가 형세가 만만치 않음을 느꼈던 모양이다.

볼짱이 최대한 시간을 소비하며 변으로 기면서 수를 늘리고 있을무렵 갑자기 옆테이블에서 탄성이 터졌다.

"어머, 내가 이겼네?!"

수님 특유의 탄성과 목소리였다. 1라운드 최대의 관심국(단톡방 사람들에게는)이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볼짱은 자신의 대국때문에 별로 신경은 못썼지만 속으로 수님에게 축하를 건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심 영구님을 응원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건 수님이 패배하기를 바랬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자라면서 어느날 아버지의 주름살을 보았을 때, 아버지의 흰머리를 보았을 때, 어린시절 우상이었던 아버지가 그 강한 모습 그대로 좀 더 남아주기를 바라는 아들의 마음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이 지면을 빌어 수님에게는 다시 한번 축하를 건네고 싶다. 기염을 토했다는 말은 이럴때 쓰는 말이겠지.

실제로도 이 대국은 대회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대국이 되고 만다.

한편 볼짱과 중학생 고수는 서로 시간을 거의 다 소비하며 엔딩을 하고 있었다.

경황이 없어 주변을 둘러보진 못했지만 사람들이 하나둘 우리 주변으로 몰려드는 것으로 보아 1라운드 10판 중에 우리판이 제일 늦게 끝나는 듯 했다.

정확히 돌 수를 세지는 못했으나 막판까지 미세한 결과가 나올것 같은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거의 없고 정확한 길은 보이지 않으니 감각에 의해 둘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엔딩 감각이란 경험이 많은 쪽이 조금이라도 유리하기 마련인데 볼짱은 오프라인 경험도 부족하고 대회 경험도 부족하고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다.

마지막 두어칸을 남겨놓고 무언가 이기기는 어렵겠다는 감이 왔다.

패리티는 내가 가져와서 마지막 수는 내가 두게 되었지만 흑을 쥔 상대의 마지막 손놀림이 자신이 없는 손놀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의 시간을 다 쓰게 하면서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판이었으므로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었다.

마지막 돌을 뒤집고 나자 언제 오셨는지 영구님이 뒤에서 내 두 어깨를 잡아주시며 말했다.

"수고했어!"

영구님은 내 뒤에서 돌 수를 세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약간 백이 모자르다는걸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볼짱은 그 수고했다는 말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했다.

나름 죽을 힘을 다해 둔 판이었는데 그 고생을 스승님이 인정해주셨다는 고마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구님은 모르셨겠지만 그 한마디가 정말 큰 힘이 되었고 후에 2,3라운드를 치루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모름지기 진실한 위로와 격려란 이런것이 아닐는지.

대국이 끝나고 심판을 맡아주신 홍성욱님이 돌 수를 세주셨다.

"34...인가"

"34:30으로 흑승이네요"

잠시 정적이 흘렀던 것도 같다. 볼짱은 수계산도 제대로 안된 상황에서 선전했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어찌 패배의 아쉬움이 없었겠는가.

누군가의

"오늘 34:30이 많이 나오네... 강자들이 많이 나왔어..."

라는 말을 위로 삼으며 볼짱은 머리속을 정리하기 위한 담배를 피우러 흡연구역으로 갔다.

영구님은 내게 나랑 둔 학생이 3단이며 무슨 대회에서도 우승한 강자라고 얘기해주었다.

'그래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구나...'

'남은 라운드 잘 두면 되지 뭐...'

볼짱은 질 사람에게 진 것일 뿐이라고 애써 위안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1패를 안고 시작하는 상황에서 남은 라운드는 도대체 어떻게 될까.

불과 몇시간 뒤에 겪게 될 운명에 대해 볼짱은 스스로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덥고 습한 여름날 롯데백화점 옥상에서 내려다 본 도심의 모습은 담배 연기와 함께 뿌옇게 가라앉아 있었다.

  • 계속 -

다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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