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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zzang wrote this on 08/02/2015 20:16 in 전국대회, 참가기

볼짱의 전국대회 참가기 (3)

대회라는 곳을 참가 하게 되면 그것이 무슨 대회이든 간에 여러사람이 모이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그 중에는 남다른 분들도 보이기 마련이다.

오델로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을 얘기할 때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 한분 계시다.

하승섭5단.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하승섭님은 시각장애인이시다.

시각장애인이므로 만져보면서 둘 수 있는 특수 오델로판에 두시는데,

이 말은 곧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야 눈으로 보고 두는 것이지만 그 분은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려가며 둔다는 뜻이 된다.

얼핏 그럴수도 있겠다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오델로라는 게임이 서로 흑돌 백돌을 뒤집는 게임인데 자기가 머리속에 뒤집힐 돌 안뒤집힐 돌을 그려가며 둔다는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싶다.

그러나 세상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고 그 모습을 실제로 보는 사람 입장에선 경이롭기까지 하다.

볼짱은 대회 참가전 그린님에게 승섭님의 얘기를 잠깐 들은 적이 있다.

과거 대회때 그린님과의 대국에서 돌을 만져보며 두시다가 어느 순간 손을 딱 내려놓으시더란다.

머리속에 그림이 다 그려졌다는 뜻인데, 그린님은 그 경건하며 엄숙하기까지 한 모습에서 어떤 경외감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승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누군가 승섭님을 만났을 경우 익숙치 않은 장애인용판과 상대가 돌을 만질 때 이쪽에서 판이 안보이는 점 등이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담배를 피우고 내려가니 2라운드 페어링을 시작하고 있었다.

볼짱의 사매라고 할 수도 있는 수님이 승섭님과 마주하게 됐다.

나는 속으로 수님이 앞서 말한 변수 등으로 인해 승섭님과의 대국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를 잠시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쥐가 고양이 생각해주는 격.

볼짱에게는 1승이 시급했다.

10개의 대국판 중 가장 마지막 자리에 착석하게 된 볼짱의 2라운드 상대는,

'초등학생...!'

대회에는 초등생으로 보이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으므로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지만, 막상 마주하고 앉아보니 어린 학생과 두는 어른의 부담감이 저 밑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린 학생에게 져도 문제고 이겨도 그닥 기뻐할 수 없을 것 같은 부담감.

이겨야 본전이란 말이 이럴때 쓰는 말이 될는지.

게다가 초등생 고수도 많은게 바둑이나 오델로 같은 게임이다보니 부담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그래, 반전무인이란 말이 있지. 판만 들여다보자.'

바둑 격언중에 반전무인(盤前無人-바둑판 앞에서는 상대를 잊어라. 상대가 누구든 의식하지 말고 대국만 집중하라는 뜻)을 떠올리며 볼짱은 흑돌을 집어들었다.

볼짱은 대회 전 흑을 쥘 경우 상대가 대각으로 들어오면 스네이크 정석을 쓰고 직각으로 들어오면 로즈를 쓰는 걸로 준비를 했었다.

'이 학생은 직각으로 받을까 대각으로 받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소년의 대각 착점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스네이크!

볼짱은 5번째 수를 변으로 빠졌고 스네이크 오프닝을 유도했다.

하지만 낭패였다. 소년은 무심한 표정으로 척척 착수를 하는데 이건 내가 아는 오프닝이 아니었다.

'아 이런... 이렇게 두는 길도 있는건가 아니면 상대의 실수인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모양상으로는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준비된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천상 내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간의 경험과 익혀온 개방도 이론 등을 가지고 열심히 길을 찾아가는 수밖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모양 자체는 낯설지가 않았다는 점이다. 상식적인 모양이 출현했다고나 할까..

아 다행스러운 점이 또 있었다.

1라운드때는 초시계 작동과 기보 작성, 판이 눈에 안들어오는 현상 등이 볼짱을 힘들게 했는데 2라운드때부터는 그런 현상들이 사라진 것이다.

한번 경험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의 차이가 이렇듯 엄청난 것이었나 싶었다.

부담감 외에 초등생 상대와 대국할 때 발생한 문제점을 하나 더 꼽자면,

바둑이든 오델로든 그동안 볼짱 앞에 앉은 사람은 나이에 상관 없이 진지한 대국자세를 가지고 임했었다.

그런데 이 어린 초등생은 심하진 않았지만 가끔 딴청도 피웠다가 대국 판도 들여다봤다가 집어들고 있는 돌도 쳐다봤다가 하는 어린이 특유의 산만함이 있었다.

아무리 상대를 잊고 대국하라고 했지만 막상 그런 모습이 눈에 들어오니 귀여운 느낌이 들어서 승부욕이 잘 생겨나지 않았다.

이런 점을 보면 볼짱은 승부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다고 져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판에만 집중하고 둬보자 하는데 중반 이후 상대가 힘에 부치는 모습이 느껴졌다.

백이 자기 공간의 외곽을 스스로 둘러싸는 수를 두었던 것이다.

'아 어쩌면 쉽게 풀릴 수도 있겠는걸...'

최대한 외곽에 있는 백돌을 건드리지 않고 안으로 파고들어 덤수를 활용하고자 했다.

그때 옆옆 테이블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영구님 목소리 같은데...'

하고 슬쩍 그 쪽을 보니 영구님과 어린 학생의 대국이었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판을 보니 판 전체에 흑돌만 새까맣게 있었던 것이다.

'설마... 퍼펙트?'

아무리 영구님이라지만 국가대표로도 나갔던 어린이(과거 뉴스에서 본적이 있다)를 상대로 퍼펙트를 낼 수가 있나!

"다시 둬보자."

하고 또 처음부터 두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 잘못돼서 재대국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바둑에서는 아주 가끔 희귀한 모양이 나와서 무승부 판이 나오면 재대국을 하는 것이 있다)

후에 안 일이지만 퍼펙트로 끝난 대국이 맞았고 일찍 끝나서 여분으로 한번 더 둔것이었단다.

그것을 뭔가 무효판이 나와서 다시 두는걸로 볼짱은 착각을 했었으니...

아무튼 영구님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대회인데 거기서 퍼펙트를 만들어버리는 힘에 감탄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윽고 볼짱의 상대가 둘 곳이 없어지자 할 수 없이 엑스스퀘어에 들어왔고 흑은 귀부터 시작해서 변을 돌아가며 뒤집을 수 있었다.

막판에 패스가 나와서 생각보다 돌 개수 차이는 더 났다.

볼짱이 마지막 돌을 뒤집자 마자,

"53대11이다."

어린 학생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아 이 학생 계속 혼자 계산하고 있었구나.'

그 혼잣말을 한 순간의 어린 학생의 멋적은 표정을 볼짱은 기억한다.

딴청을 피우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나름 뜻대로 풀리지 않는 괴로움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어려도 왜 패자의 아픔이 없었겠는가.

이대로 가다간 지고 만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두어나가야 하는 그 패자의 괴로움이 어린 학생이라고 없을리 없다.

볼짱은 나이가 훨씬 많은 어른의 시각으로만 상대를 바라보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심판 판정 후 기보에 각자 사인을 하고 제출한 뒤 시계를 바라보니 10분정도가 남았던 것 같다.

이겼다는 기쁨도 없이 약간 멍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게실로 나가는데 어느새 영구님이 다가와서는,

"무난하게 승리했죠?"

"네에..."

승리할 줄 알았다는 뜻이었는지 승리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물어보신건지 잘 몰랐지만 왠지 결과를 미리 알고 있던 사람 같아서 영구님이 도사같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일찍 대국이 끝난 덕에 흡연구역에서 혼자 담배를 느긋하게 피우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고백하자면 볼짱은 과거 바둑대회를 나갔을 때도 1승을 올려본 적이 없다.

바둑은 프로를 지망하거나 프로를 지망했던 사람들이 주로 모여드는 탓에 1승 한번 하는게 하늘의 별따기다.

심지어 토너먼트거나 토너먼트와 별 차이가 없는 리그전이어서 1판 지면 그대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볼짱은 지금 이 승리가 무슨 대회를 나가서 거둔 첫 승리였던 것인데, 심정은 담담했지만 생각해보면 개인적으로는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수님처럼 첫 대회 출전에 첫판 승리로 시작한 사람은 상당히 복 받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과거 우리나라 축구가 월드컵에서 1승 한번 하는게 소원일 때 마침내 그것을 이룬 느낌이었다면 지나칠는지.

이 역시 후에 안 일인데 나와 대국한 그 학생은 초단이라고 했다.

어쩐지 심판이 판정을 한 직후 대회 관계자가 그 초단 학생에게 왠일로 졌냐는 시선을 보내더라.

1라운드 학생은 3단, 2라운드 학생은 초단(둘다 아마 단수가 아니었다)이었으니 볼짱이 무언가 힘든 판들을 두고 있구나 싶었다.

아직 남은 판은 3판.

전패는 2라운드에서 면했으니 기왕 이리된거 최선을 다해보자 하면서 다시 대국장으로 향했다.

  • 계속 -

다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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