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 Oth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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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zzang wrote this on 01/15/2016 09:32 in 오델로, 소설, X-square, 세 가지 스승

세 가지 스승 (2)

구름 한점 없는 파아란 하늘이 끝없이 펼쳐진 가을 아침, 저 멀리서 갈매기 몇마리가 끼룩끼룩 부산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철퍽하며 방파제에 부딪히는 소리도 들렸다.

양어깨에 배낭을 짊어진 카이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부산국제여객터미널이라고 쓰여진 입간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여긴 왜 오게 된거야 나는”

카이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삐쭉 내밀면서 혼잣말을 내뱉았다.

민혁의 문자 메시지가 1:3 대국이 벌어진 날 밤에 도착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예상하던 것이 아니었다.

어디어디에 살고 있는 재야고수를 만나라는 식의 통보가 올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날 밤 카이에게 온 문자 메시지는,

'대마도 하나비 민숙집 박사장님.'

이 한줄이 전부였다.

오델로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부산도 아니고 대마도를 가라니 카이는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슨 뜬금 없는 지령이냐고 항의라도 해볼까 했지만 민혁의 휴대폰은 그 날 이후로 계속 꺼져있을 뿐이었다.

그 덕분에 지난 3일간은 부산으로 가는 ktx 기차편과 대마도로 가는 배편, 민숙집 예약 등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무슨 재야고수가 대마도에 살고 있냐... 할 수 없지.”

카이는 입을 굳게 다물며 힘찬 발걸음으로 대마도로 가는 배편에 몸을 실었다.

이윽고 여객선이 출렁이는 바다위를 가르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좌우로 갈라지는 바다 위로 갈매기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지수와 현서에게는 어떤 스승들을 소개해줬을까...'

카이는 잠시 지수와 현서를 떠올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카이에게 그들은 좋은 라이벌이자 친구들이었다.

모두 저마다의 장점들이 있었고 카이는 그들에게서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점들을 발견할때마다 내심 대단하다고 여기곤 했었다.

내색은 안했지만 지수의 차분함이나 현서의 번뜩이는 감각은 카이도 분명 배우고 싶은 부분들이었다.

민혁이 알려준 박사장님을 만나면 지나치게 공격적인 기풍을 유연하게 바꿀 수 있을까.

카이는 기대반 우려반으로 창밖으로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볼 뿐이었다.


몇시간 뒤 여객선은 대마도에 도착 했다. 한적하고 조용한 항구 뒤편의 야산에는 뻘건 단풍이 울긋불긋 배어있었다.

저 너머에는 일본식 신사의 입구가 기묘한 포즈로 서있었다.

배편으로 하는 여행은 처음이기도 했고 낯설어할만한 광경이기도 했지만, 낯선 곳에서의 적응은 누구보다 자신있는 터였다.

카이는 휴대폰을 들어 예약한 민숙집에 전화를 했다.

“아 오셨습니까. 지금 곧 차를 가지고 마중나가겠습니다.”

박사장님 본인인 듯한 활기찬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부터 들려왔다.

카이는 항구에 걸터앉아 반대쪽 도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에 온것은 맞는지라 자기도 모르게 약간의 설렘이 일었던 것 같다.

“카이씨 맞죠?”

카이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언제 도착했는지 40대 후반 정도 되어보이는, 구릿빛 피부의 다부진 체격을 가진 남자가 서있었다.

'오오 이분이 오델로 고수 박사장님...! 무언가 생동감이 넘치는걸!'

카이는 정말로 좋은 스승을 만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네. 맞습니다. 박사장님이시죠?”

남자는 대답하려다 말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카이의 얼굴과 배낭 등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왜... 왜 그러시죠? 하하...”

카이는 남자의 이상한 행동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짐이 그게 전부에요?”

“네? 그쵸... 약간의 옷가지랑 세면도구. 그리고... 오델로판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오델로요?”

“네. 오델로. 재야고수 박사장님 아니신가요. 오델로를 배우러 왔는데요. 하하.”

카이는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애써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난 오델로가 뭔지 모르겠는데... 그게 뭐에요?”

“네? 하나비 민숙집 박사장님 아니신가요?”

“맞긴 맞는데... 난 그게 뭔지를 모른다니까.”

“유민혁 9단이 제 얘기 안하던가요?”

카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됐다 이건.

“몇일전 민혁씨에게 전화가 오긴 했지... 옛날에 우리 민숙집에서 민혁씨가 묵은적이 있긴 하거든.”

“뭐라고 하던가요?”

“그냥 자기가 묵었을 때처럼 잘 해주라는 얘기만 하던데.”

'뭐...뭐야 그 인간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민거야...'

카이는 민혁이 자신을 골탕 먹이는건가 싶어서 약이 올랐다.

“아무튼 이거 가지고는 안될테니 저를 따라오시죠.”

먼저 앞서서 걸어가는 남자를 바라보던 카이는 할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박사장이라고 불리우는 저 남자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배편은 3일 뒤에나 있을 터였다.

남자가 도착한 곳은 작은 마트였다. 그는 한켠으로 가더니 카이는 처음 보는 물건들을 마구마구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계산대에서 남자가 카이에게 말했다.

“계산하시죠.”

카이는 흠칫 놀랐다.

'계산? 이걸 내가 왜 사? 도대체 이게 뭐에 쓰는 것들이야?'

남자는 계산하라는 말만 남긴채 마트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카이는 점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돈을 지불하고 나온 카이는 물건을 들고 더는 못참겠다는 듯이 남자에게 달려갔다.

“박사장님! 이건 너무 하잖습니까! 제가 이걸 왜 계산해야하죠?!”

작은 미니 봉고에 올라타며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일 카이씨가 쓸 것들이니까 카이씨가 사야죠.”

“네? 제가 이걸 왜써요? 이게 뭔데요?”

“그건 찌와 낚시 바늘, 낚시줄 같은 것들이죠”

“낚시요?!”

카이는 뒤로 자빠질뻔했다. 오델로를 배우러 왔는데 갑자기 낚시라니 이 무슨 해괴망칙한 소리인가.

민숙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카이는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이미 밤은 깊었고 배는 고팠기 때문에 뭐라 대꾸를 해야할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컴컴한 밤 민숙집에 도착한 카이는 일단 먹고나 보자 하는 식으로 박사장이 차려준 저녁상을 흔적도 없이 먹어치웠다.

카이가 식사를 마친것을 본 박사장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가지고 나와 카이 앞에 내놓았다.

“이건 또 뭔가요?”

멀뚱멀뚱 쳐다보며 묻는 카이에게 박사장이 대답했다.

“낚시 바늘과 낚싯줄입니다. 이제 이거 묶는 법을 알려드릴테니 따라해보세요.”

카이는 나한테 왜이러느냐는 표정으로 울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박사장의 표정과 행동에 진지함이 묻어 있던 탓에 카이는 그 말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자... 이렇게... 아니아니 그게 아니고 이렇게 손끝으로 말아가지고...”

“아얏!”

“바늘에 찔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섬세한 작업입니다.”

몇번 바늘에 찔려가며 카이는 엉성하게 낚시바늘에 낚싯줄을 묶었다.

“그렇게 엉성하게 묶으면 안되구요, 다시 해보죠. 이거 숙달이 되어야 합니다.”

카이가 묶는 것을 보더니 박사장이 말했다.

“이제 대충 아셨죠? 자기전에 이거 100번 묶고 주무세요. 숙제입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저랑 나가시죠.”

카이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지만 이제와서 되돌릴 수도 없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민혁이 의도한 것이기를 바라면서 박사장의 말대로 해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낚시바늘에 낚싯줄을 묶다가 자꾸 줄이 벗겨졌다.

손에 너무 힘을 주어도 안되고 너무 힘을 빼도 안되는, 적절한 힘이 들어가야 겨우 온전히 하나를 묶을 수 있었다.

“도대체 난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건가 지금...”

갑자기 답답해진 카이는 잠깐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가을밤의 청량한 바람이 쿨렁 하고 얼굴을 때렸다. 사위가 컴컴하고 고요한데 오직 수없이 많은 별들만이 양탄자처럼 밤하늘에 깔려 있었다.

별들이 깜빡이는 모습이 꼭 뒤집고 뒤집혀지는 오델로의 흑돌 백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별들이 이렇게 많은거였나... 굉장한걸...”

뒷목을 젖혀 하늘을 바라보던 카이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지수는 어디선가 맹훈련 중일텐데 난 여기서 이래도 되나...”

카이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으나 이내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한적한 곳에 오니 좋기는 하네.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지.”

카이는 양팔을 들어 기지개를 휘휘 켜면서 남은 숙제를 마저 하러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대마도의 서늘한 밤바람이 닫히는 문 사이로 툭하고 부서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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