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 Oth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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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zzang wrote this on 10/02/2017 06:09 in 오델로, 소설, X-square, 승부의신

승부의 神 (3)

톡.톡.

톡.착착착.

여기저기서 돌을 놓고 뒤집는 소리가 들린다.

초시계를 누르는 소리마저 소음이 되는 조용한 대국장에는 이따금 들리는 대국자의 숨소리만 그 승부의 치열함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줄 뿐이다.

여러사람이 모여 저마다의 대국에 집중하고 있는 대회장의 모습은 그 규모에 관계없이 승부를 향한 인간의 집념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어쩌면 대회장에서 들리는 대국자의 숨소리는 뇌가 호흡하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신성하기까지한 승부의 장 곳곳에는

승부의 신이 말 없이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 수는 일전에 유사범님이 뒀던 수랑 똑같아...!'

카이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판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상대는 약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압 못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카이의 수읽기로써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문제는 상대가 지금 형성된 모양에서 엑스스퀘어를 찔러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여기서 이 수는 부분적으로는 성립이 안되는 걸로 봤는데... 뭐가 있나.'

카이는 본능적으로 이곳이 승부처임을 직감했다. 여기서의 실수 한번이 승부를 가른다.

'시간은 이런 곳에서 쓰라고 있는 거겠지. 이까짓거 힘으로 밀어붙이면...'

카이는 고개를 돌려 본인의 시간이 7분 정도 남은 것을 확인하고 장고에 들어갔다.

'이쪽 코너를 상대에게 주고 반대쪽을 취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랬을 경우 패리티가 문제가 되겠지만...왜 수가 안보일까. 음...'

카이의 상대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낀 채 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상대의 편안한 모습을 본 카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상대를 힘으로만 제압하려는 자세에는 은연중 상대를 가벼이 여기고 있는 마음이 들어있을겁니다.' 

'그랬군...'

대마도에서 박사장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눈을 뜬 카이의 눈에 반대쪽 코너의 모양이 들어왔다.

'나중에 저 모양은 패스가 나오는데... 그렇다면... 이쪽을 주고 저쪽을 가져간다음 패스를 얻으면...'

남은 시간이 2분을 가르켰을 때 카이의 손이 돌 하나를 집어들었다.

'...'

말없이 코너를 상대에게 내어주는 수를 택하는 카이를 보면서 얼굴이 둥그스름한 상대 남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척.척.척.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듯 두 남자는 남은 공간을 빠르게 메워갔다.

상대가 하변을 취하자 카이는 상변을 취하고 마지막 다섯칸이 남았을 때 카이가 십여수 전부터 보아왔던 패스가 발생했다.

"역시.. 패스인가."

상대의 들릴듯말듯한 혼잣말을 들으며 카이는 마지막 돌을 뒤집었다.

결과는 흑33. 카이의 신승(辛勝)이었다.


'치잇!'

현서는 자신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초시계를 눌렀지만 이미 자신의 시간은 3분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반면 상대의 시간은 15분이나 남아있었다.

"흠... 이제 알아차렸나..."

중얼거리는 상대를 현서는 흘깃 쏘아보았지만 룰은 룰이었다.

상대의 매너가 좋다고 칭찬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룰을 어긴 것은 아니었고 잘못이라면 현서가 초시계를 누르는 것을 잊었다는 것이었다.

'아 큰일이다... 지면 안되는데... 어쩌지...'

국면은 현서가 유리하긴 했으나 얼마남지 않은 시간으로 인해 당황하고 있었다는 것이 변수였다.

현서가 얼굴이 벌개진 상태로 머리를 푹 숙이고 판을 보고 있을 때 상대는 여유있는 모습으로 변쪽을 두어왔다.

'빨리 착점해야하는데, 아... 수가 보이지 않아.'

그 때 현서는 아까 지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기보를 남기겠다. 그것만 생각해.' 

그 말을 떠올리자 현서는 얼마간 진정이 되었다.

'그래 판만 보자. 3분이라면 충분해.'

남은 칸은 아홉칸. 패리티는 백이 가지고 있었고 코너를 지키기만 하면 되는 형세였다.

'상변의 한 곳은 흑이 못들어오니까는... 여기다! 우상의 엑스.'

현서가 G2 엑스를 두었을 때 남은 시간은 2분. 흑은 잠시 움찔하더니 현서가 예상하지 않은 반대쪽 엑스를 두었다.

'응? 저긴 딱 봐도 마이너스20은 되는 곳인데 왜 저기를... 뭐지?'

현서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 현서의 시계는 어느새 1분 30초를 가르키고 있었다.

'...!'

'설마... 이 아저씨 내 시간패를 노리고 있는건가. 전혀 엉뚱한 곳을 둬서 생각하게 하는게 목적이었어!'

'끙... 그렇다면.'

현서가 잠시 판을 내려다보다가 코너에 착점을 했을 때 남은 시간은 불과 50초였다.

'후후후... 이 꼬마녀석 완전히 흔들리고 있군. 남은 시간동안 돌이나 다 뒤집을 수 있을까. 이제 넌 시간패다 꼬마야.'

머리가 듬성듬성한 상대는 또 다시 엉뚱한 곳에 두어왔다.

그러나 현서는 이번에는 별 생각 없이 바로 착점을 해버렸다.

'응? 뭐지? 이 녀석. 승부는 포기한건가. 바로 저기를 둬?'

척.

척척.

노타임으로 응수를 하는 현서를 보며 이번에는 상대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뭐지? 생각을 안하고 아무데나 둬도 이긴다는거야 뭐야?'

마지막 2칸이 남았을때 현서의 시간은 10초였지만 10초면 한줄은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현서의 옆에는 시간패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심판이 일찌감치 다가와서 대국의 마무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쳇 이 한줄을 다 뒤집어보라고!"

흑을 쥔 상대가 자신의 마지막 수를 두자 현서는 바로 마지막 코너를 두고 한줄을 주르륵 뒤집었다.

척척척.

7,6,5,4...

현서가 한줄을 다 뒤집고 초시계를 누르자 시계는 남은 시간 2초를 가르키고 있었다.

그리고 판 위에는 백돌 40개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수룩해보이지만 그 눈만은 빛나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특히 자기와 승부를 내려하는 상대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는 것은 심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다.

지수는 특별히 상대를 의식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본인이 C스퀘어로 빠졌을 때 승부수임을 직감하고 장고에 들어간 상대를 흘깃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날카롭게 반상을 주시하고 있는 상대의 표정으로 인해 지수는 실로 오랜만에 입이 바싹 마르는 긴장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패리티라면 백을 쥔 상대가 유리하다. 상대에게 하변을 주더라도 블랙라인을 살려보겠어. 대각을 지키는 방향으로 가는거야.'

지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반상을 주시하고 있을 때 돌연 상대의 손이 반대쪽 C스퀘어로 향했다.

'응? 버티는건가. 나보고 들어와달라는 거지. 그럴 수는 없지.'

지수가 B7 엑스스퀘어에 착점하면서 블랙라인을 살리자 상대는 또 한번 빙긋 웃었다.

"에구구. 이젠 패리티 싸움인가. 음..."

지수는 상대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생각했다.

'승부사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휘두를 수 있는 비수를 감춰두어야 한다. 경덕사 흰둥이가 기회를 엿보다가 한방에 상대를 제압한 것처럼.'

지수는 반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녹차 한모금을 마셨다.

'지금 흑은 패리티를 직접 뺏을 수는 없지만... 그거다!'

상대가 패리티를 지키기 위해 홀수칸 쪽을 먼저 둬오자 지수는 순순히 받아주었다.

척척.

주르륵.

상대가 하변의 흑돌을 백돌로 뒤집었을 때 남은 칸은 불과 네칸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아주머니는 엄청난 집중력을 활용해서 계속 돌을 세고 있었다.

'좋아. 흑이 이쪽을 두면 30, 저쪽을 둬도 30, 저쪽은 29, 나머지 한곳은 스스로 패스가 나는 곳이니까 둘 수 없..'

'앗?! 서... 설마!'

바로 그때 지수의 흑돌 하나가 스스로 모양을 무너뜨리는 곳에 놓여졌다.

'아뿔싸...!'

상대 아주머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1분여간 반상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상대는 이내 굳은 표정을 풀고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둘 데는 여기 한 곳 있고... 에고 내가 패스를 얻었네. 백인데 패스를 얻었어. 깔깔."

지수는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본인의 착수 없이 초시계를 꾹 눌렀다.

상대가 한번 더 두고 마지막 지수가 흑돌을 뒤집음으로써 대국은 종료됐다.

반상 위에는 흑돌 34개와 백돌 30개가 서로 얽히고 섥힌채로 남아있었다.


투둑투둑 빗소리가 두 남자의 커피잔 속으로 톡톡 떨어지고 있었다.

철 지난 가요가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두 남자가 머리를 맞대고 스마트폰 액정을 주시하는 그 광경은 흔치 않은 풍경임에 분명했다.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청년이 흑으로 첫수를 두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민혁의 다음 착점에 청년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건 평행 오프닝!'

"... 이런 마이너스 오프닝을 두시다니요. 저를 얕보시는건가요."

청년은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오델로는 흑돌과 백돌이 인접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둘 수 있는 착점의 자유가 있지. 마이너스 오프닝은 두면 안된다는 룰이 있던가."

민혁이 대답하자 청년은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건 아니지만 이런 오프닝으로 상대하실줄은...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그건 이기고 나서 얘기하지 그래."

"좋습니다. 이런 초보자 오프닝으로 승부가 제대로 될는지요. 유민혁 9단이라면 좀 난해한 고급 오프닝이 나올줄 알았는데... 이건 뭐. 시시하게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

"..."

민혁은 더 이상 어떤 대꾸도 하지 않고 말없이 착점을 이어갔다.

청년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척척 응수를 하고 있었다.

10여분이 지났을 무렵, 스마트폰에 켜진 오델로판에는 절반 정도의 흑돌과 백돌이 채워져 있었다.

"이제 좀 할만해 진 것 같군."

민혁이 오랜만에 입을 열며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어... 어떻게 형세가 비슷해진거지? 내가 잘못 둔게 없었을텐데...'

청년은 다시한번 판을 굽어보았다.

'아니야... 아직 내가 유리해. 형세는 비슷해진게 아니야. 흑은 파고 들면서 백의 수를 잡을 수가 있다...'

청년은 입을 꾹 다물고 말없이 우변을 취했다.

그러나 백은 흑의 응수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중앙의 흑돌을 관통할 뿐이었다.

'자 이제는... 칼을 뽑아들 때인가...'

청년이 한 수를 두고 다음 수를 두기 위해 자세를 고쳐앉을 찰나,

'어?!'

청년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흑을 관통한 백돌들이 흑의 이어지는 착점을 교묘히 전부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이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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