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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zzang wrote this on 08/07/2015 01:29 in 전국대회, 참가기

볼짱의 전국대회 참가기 (5)

4라운드 상대인 리치님과는 오프 모임에서 둬본적이 있기는 하다.

단지 둬본적이 있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대회장에서 마주했을 때의 위압감은 그때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다.

판을 노려보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먹잇감을 찾는 한마리 야수와 같았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볼짱이 원체 새가슴인 탓도 있겠지만 리치님은 이 대국을 반드시 이기기 위해 집중력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하지만 볼짱은 그점이 오히려 더 감사했다.

객관적인 전력상 리치님은 볼짱보다 몇레벨은 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객관적인 전력차를 감안하면 느긋하고 편하게 두면서 이기려고 해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닐텐데,

첫수부터 한수 한수를 아주 신중하게 천천히 두는 모습이 상대를 최대한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볼짱의 첫수에 이은 백의 직각 착점.

'그렇다면 미리 준비한 로즈 오프닝으로 가야하는데... 난감하군...'

난감한 이유는 간단했다.

리치님으로 말할것 같으면 소위 로즈의 달인이라고 불리어도 좋을만큼 로즈 오프닝에는 통달한 사람이다.

로즈라는 이름을 모를때부터 그 오프닝을 쓰고 있던 사람이면 거의 원조급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 로즈를 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공자님 앞에서 하늘천 쓰는 꼴이 될 것임이 너무나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준비도 안된 막가파 오프닝을 쓰는것은 더더욱 안될 말이었다.

'그래... 어차피 내가 로즈로 가도 리치님 정도면 분명히 중간에 틀어서 나올테니까 그게 그거겠지...'

볼짱은 미리 외워둔 로즈 오프닝을 두어나갔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리치님이 뻔한 곳에서도 계속 장고를 하길래 당연히 비틀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결국 나오는 착점은 정석 그대로였던 것이다.

'뭐지? 왜 틀지 않지? 안틀거라면 왜 이렇게 생각을 오래하지?'

볼짱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상대의 의중을 알 수 없는데서 오는 불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신중함을 넘어선 무엇이 있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놓여진 돌만을 본다면 전형적인 로즈 오프닝에 이은 최선수가 두어지고 있는것 뿐이었다.

여기서 하나 에피소드를 얘기하자면 이 오프닝에서 이어지는 최선수의 수순은 사실 대회 몇일전 리치님이 온라인에서 볼짱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볼짱이 온라인에서 로즈 오프닝 이후 후속수단이 여의치 않아 당하곤 해서 리치님께 이후 수순을 물어봤는데 이러이러하게 두라고 알려준 적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회에서 그걸 가르쳐준 사람에게 똑같은 모양으로 두고 있는 것이다.

정말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 너무나 많다.

어쨌든간에 볼짱은 15수 정도를 기계적으로 두어나갔다.

일반적으로 서로 30수 정도를 두면 오델로 한판이 끝나는데 서로 15수 정도를 두고나니 남은 칸은 30여칸밖에 없었다.

이런 진행이라면 고수와 대국하는 하수의 입장에서는 변화의 여지가 절반가까이 줄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리치님은 특유의 자리에 일어서서 판을 굽어보는 스타일로 여전히 장고를 하며 한수 한수를 두어나갔다.

볼짱도 장고파라 바로 옆의 수님과 협회장님과의 대국에 비하면 아직도 빈칸이 많이 남은 상황이었다.

리치님이 장고 하는 중에 옆 대국이 거의 끝나가는 것 같아 슬쩍 쳐다봤더니 세상에, 수님이 간신히 퍼펙트만 면하고 있었다.

'수님이 저렇게 당하다니...!'

새까만 흑돌로 뒤덮여진 판을 보며 고수의 무서움이란 이런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해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쪽 판이었다.

볼짱앞에 앉아 있는 리치님도 최고수중의 한명인데 계속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대국을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우리 쪽으로 모여들었다.

옆의 협회장님은 수님을 꺾고 4승을 결정지었으므로 그때까지 3승을 달리던 리치님이 만약에 지면 본인이 우승할 확률이 매우 높아지게 된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리치님과 볼짱의 대국이 4라운드 최대의 관심판이 된 것이다.

볼짱은 처음에 사람들이 모여드는걸 느꼈을 때,

'관심판처럼 보이지만 내가 이길 확률은 거의 없으니까 너무 관심들 안두셔도 되는데...' 라고 생각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오프에서 이겨본 경험도 없거니와 온라인에서도 레벨 차이가 너무 났기 때문이다.

그 때 볼짱은 그저 최선수라고 생각되는 곳을 두어보자 하고 두고 있었을 뿐인데 주변에서 관전하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왜들 저러지... 형세가 만만치 않기라도 하단건가.'

볼짱은 가만히 판을 들여다보았다.

'응?! 이거 뭐지? 설마...!'

그랬다. 무언가 패리티를 잘 활용하면서 마무리하면 흑에게도 승산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볼짱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볼짱이 이기기라도 하면 협회장님이 우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짐과 동시에(돌개수가 매우 많았던 것으로 안다) 리치님은 우승권에서 멀어지게 된다.

즉 이번 대회 우승자의 향방은 이 대국 결과에 따라서 요동을 칠 수가 있던 것이다.

잠시 뜬금 없을지 모르지만 여기서 대한민국 바둑역사에 길이 남을 제1회 응창기배 세계바둑 결승전때의 비화를 얘기하고 싶다.

결승5국에서 우리의 조훈현 9단이 승리할때 상대인 중국의 녜웨이핑9단의 심리적인 부담감이 크게 작용한 것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 심리적 부담감이란 반드시 이겨야 하는 중요한 대국에서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들게된 "의구심"이었다고 한다.

내가 이기는건가. 정말 내가 유리한게 맞는가. 혹시 상대의 반격수는 없나. 이 유리함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데. 상대의 묘수가 나온다면.

이런 의구심이 증폭되면서 무언가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가속되었고, 끝내는 최선을 두려던 마음이 거꾸로 실착을 두게 하여 조훈현9단에게 역전승을 헌납했다는 이야기이다.

볼짱이 당대의 고수는 아니지만 우습게도 이날 리치님과 대국을 하며 똑같은 일을 겪고 말았다.

'내가 이길 수도 있는건가.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질까. 말도 안돼. 반격수단이 있을거야. 내가 모양을 착각하고 있는지도 몰라...'

이런 의구심과 불안함이 꼬리를 무니 무언가 계산에 의한 평범한 수들은 거꾸로 당할것만 같았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상대가 못보고 있을만한 묘수가 없는지를 찾게 된 것이다.

이럴 때 묘수를 둠으로써 판을 쉽게 마무리 하고 싶은 조급함은(그것도 고수를 상대로) 절대 갖춰야할 덕목이 아닐텐데...

딴에는 볼짱이 묘수라고 생각한 a3에 착점을 하고 어쩌면 이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

옆에서 지켜보던 협회장님이 뭐가 그리 안타까웠는지(물론 협회장은 리치님이 볼짱을 이기고 본인과 대국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 여기 뒀으면 그냥 이기는 거였는데요..."

얼마나 아쉬웠으면 아직 대국중인데도 자기도 모르게 비어있는 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런 말을 했을까.

"아직 대국 안끝났잖아?!"

건너편에서 지켜보던 영구님이 한마디 하셔서 대국장은 다시 잠잠해졌다.

이 판이 얼마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긴박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대국은 볼짱이 마지막 엔딩에서 실족하며 35:29로 졌다.

리치님에게 졌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문제는 대회 종료후 기보를 따라 지브라로 복기해보니,

불과 8칸 남았을때까지도 볼짱이 이기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협회장이 지적한 그곳이 지나간 이후에도 계속 유리했다라는 것.

볼짱이 대회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킬뻔한 사건은 그렇게 소리 없이 지나갔다.

그 당시에는 물론 그런 것을 몰랐고 그저 조금 엔딩에서 미스가 있어서 진거라고 생각했었다.

어찌됐건 이제 5라운드에는 전승자끼리의 우승 격돌이 남았다.

볼짱은 리치님과 담배를 피우면서 꼭 이겨서 우승하라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리치님은 이제 마지막 한고비만 넘기면 우승이어서 그런지 아까보다 더욱 진지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가지고 수를 연구했다.

참으로 사연많은 대회가 한 라운드만을 남긴채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 계속 -

다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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