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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zzang wrote this on 04/01/2018 02:17 in 오델로, 일본명인전, 참가기, 후기

일본 명인전 참가 후기 (2)

하야님, 리치와 함께 호텔 조식을 먹고 대회장으로 향하는 아침. 약간 흐릿한 일요일 고베의 아침은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더더욱 조용한 느낌이었다. 어떤 선수랑 만나서 어떤 플레이를 하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 긴장감이 아주 없을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크게 떨렸거나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워낙에 강자들이 모여드는 대회인지라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리라. 2015년 영국 세계대회 때 시합장으로 가던 아침과 잠깐 오버랩 되었다. 외국 선수랑 시합하러 가는 상황은 비슷했지만 그 때랑은 느낌이 많이 달랐다. 2015년에는 입단을 하기 전이었으며 대회 경험도 별로 없었다. 즉 그때의 실력은 지금보다 훨씬 못했기 때문에 해야할 걱정 안해야 할 걱정, 벌어질 일과 벌어지지 않을 일 모두가 머릿속에서 혼재되어 있었다. 멘탈이 달달달 떨고 있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은 얼추 어떤 식으로 대국에 임하는 것이 좋다 하는 정도의 감은 가지고 있기에 비교적 덤덤한 마음으로 시합장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전날 규모를 보고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무차별부가 벌어지는 날이다보니 참가자가 그야말로 바글바글했다. 수백명의 사람이 모여들어 대혼잡이었는데 사진에서만 보던 일본의 내로라하는 오델로 고수가 다 모여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좀 묘하기도 했다. 맨 앞에 전날 타카하시를 누르고 어린이부 우승을 차지한 후쿠치 5단이 보인다. 귀여운 외모에 어른들 양쪽 뺨을 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후쿠치 5단의 옆에는 늘 신기한 듯 쳐다보는 어른들이 많았다. 나를 포함해서...

선수등록을 마치고 외국 선수(나와 리치, 하야님, 그리고 대만에서 온 타이완 찬)의 소개까지 끝나자 1라운드 페어링(100판 정도가 되는)이 전광판에 떴다. 워낙에 대국수가 많아 자기 이름 찾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걸렸다. 방도 작은방 2개 큰방 1개에 나눠서 치러질 정도였으니... 저마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혼잡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역시 서로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자기 자리로 가기 위해 서로 흩어졌다.


1라운드 – 공포의 드로

나의 첫 상대자는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일본의 초단이었다. 유명한 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일본에 오기 전 그린이 한국의 2단이시니 일본의 초단, 2단은 이기셔야죠라는 말이 떠올라서 돌을 가를 때부터 이미 잘 두고 싶은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일본 대회의 돌가르는 룰을 살펴보겠다. 1.고단위자(단이 같을 땐 연장자)가 손 안에 돌을 하나 쥔다. 2.상대는 손 안에 있는 돌의 위가 흑이다 또는 백이다를 말한다.(맞춘다) 3.맞추면 맞춘 사람이, 틀리면 돌을 쥔 사람이 흑/백을 선택하거나 비겼을 때 승리하는 카드를 선택한다. 즉 돌을 선택하거나 비겼을 때 승리를 선택하거나인데 돌을 선택하면 상대는 자연적으로 비겼을 때 승리하는 카드를 가지게 되고 비겼을 때 승리하는 카드를 선택하면 상대는 흑/백을 선택할 수 있다.

별 대단한 룰이 아니라고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돌을 가린 결과 돌 색깔을 맞춘 내가 백을 가지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나는 시합전부터 내가 돌을 선택할 수 있게 되면 백을 선택하리라고 마음먹었었다. 오델로는 흑백의 유불리가 5:5로 밝혀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내 수준에서는 패리티를 가지고 있는 백이 좀 더 편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드로가 날 확률은 적으니 비겼을 때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아예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

흑을 쥔 상대는 그린버그 오프닝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나는 운좋게도 시합 얼마전 그 오프닝에서 자주 당하는 모양을 연구한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 내가 자꾸 실족하는 모양이 있었는데 실제 시합에서 그 모양이 그대로 나오자 내심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 함정을 피해가면서 두니 상대는 점점 무너져갔다. 대충 봐도 패리티만 잡으면 낙승이 예상되는 모양으로 흘러갔고, 일본에서의 데뷔전(?)을 승리로 시작하게 된다는 달콤한 기분에 빠졌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라는 말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줄이야.

흑을 쥔 상대가 B7로 찔러온 장면이다. 당시 형세는 수치에서 볼 수 있듯 내가 +14정도로 무난히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기는 했다. 문제는 내가 여기서 경솔하게 A8로 받아준 것이다. 우상 3칸을 먼저 처리했으면 쉬운 장면이었는데...

백A8 흑B8 이후 아무리 돌을 세어봐도 이기는 개수가 안나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슴이 덜컹 내려앉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유리했는데 이럴 리가 없어 하면서 돌을 계속 세어봤으나 소용 없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허망하게 승리를 내어주나, 역시 난 안되는 것일까 같은 자책감이 짧은 순간에 마구 생겼다. G2를 두고 나서 상대가 장고할 때 눈을 질끈 감고 목을 쳐주기를 바라는 심정이 되었다. 그런데. 상대가 돌연 G7의 –12의 곳을 두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H7의 반격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H8로 받아주는 것만 생각한 듯하다. 이번에는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H7을 두고 마무리를 하니 나의 38:26 승리. 그야말로 용궁 다녀왔다는 말이 실감나는 행운의 승리였다. 비기니까 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텐데 아까도 말했듯 돌을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비기면 상대의 승리가 된다. (그 권리를 표시하는 흑백 양면을 가진 단추가 따로 있고 돌을 가를 때 그 단추는 권리를 가지게 된 색깔이 위로 가게해서 대국테이블 위에 놓아두고 대국을 해야 한다)

내가 이러한 일본 룰을 자세히 설명하는 까닭은 1라운드 나머지 두 한국선수(하야님, 리치)의 판이 공교롭게 다 드로가 나와서 패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야님은 돌을 선택했는데 드로가 나와서 진 케이스이고 리치의 경우는 상대가 돌을 선택했는데도 진 매우 황당한 케이스였다.

후에 전해들은 리치의 억울한 사연인즉슨 이렇다. 리치는 상대가 돌색깔을 선택했으니 당연히 비겼을 때 본인이 이기는 것으로 생각하고 대국을 했다고 한다. 문제는 좀 전에 얘기한 그 단추를 자신의 돌색깔로 돌려놓지 않고 방치(?)한데서 비롯된다.(사실 단추 사용법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조차도 다른 일본 선수들이 하는 것을 보다가 알아낸 룰이었으니...) 대국 종료후 정말로 드로가 났을 때 상대 일본선수가 단추의 색깔대로 승자가 정해지는 룰을 언급하며 그걸 뒤집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승자는 자기라는, 우리 입장에서는 매우 황당한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리치는 심판에게 항의해보았지만 대국전이 아닌 후에 하는 이의라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했단다. 많이 유리하던게 드로까지 차이가 좁혀진것만으로도 억울한 일일텐데 심지어 승리를 강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그 마음이 실로 어땠을까 싶다.

그 얘기를 듣고 남은 대국에 영향을 미칠까 염려되어 리치에게 별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제3자인 나로서도 매우 열받는 사연이었다. 아무리 룰이 그렇다기로서니 첫 참가하는 (말도 안통하는) 외국 선수가 그 자그마한 룰을 지키지 않았다고 자신의 승리로 기록을, 글쎄 나라면 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본인이 많이 불리했었던 판을. 대회에서의 매너와 룰을 지키는 것, 과연 그 둘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까지가 대회에서의 매너이고 어디까지가 룰인 것일까.

아무튼 나까지 비겨버렸으면 1라운드는 한국 선수 3명이 다 비기고도 지는, 하늘도 무심한 결과 앞에서 망연자실할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섬찟했다.


2라운드 – 초반 삽질엔 약도 없다

2라운드는 대학 1학년정도로 보이는 일본 2단이었다. 1라운드의 운발을 이어가며 좋은 승부를 보고자 했으나, 오프닝부터 어이없게 무너지는 참극이 벌어지고 만다. 초반 반성해야 할 장면만 잠깐 보겠다.

이번에도 백을 쥔 나는 초반 상대의 흔한 로즈 오프닝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보통의 경우처럼 상대가 G5로 두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나 상대는 자신의 장기인지 뭔지 B3으로 두었다. B4까지는 본적이 있었지만 B3은 거의 처음 보는 수로, 나로서는 수읽기로 길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진 얼추 수읽기로 쫓아가고 있었다. 이장면에서 평상시라면 B5에 뒀을 것이고 당시에도 B5에 두려고 했었다. 그런데 왠지 그 수가 너무 뻔해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D1 자리가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런 시각으로 보면 점점 그 자리가 좋아보이게 마련이다. 저런 악수 자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 판은 이기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저 당시에는 D1-E1-F1으로 진행되면 내 수가 많이 줄어든다는 사태의 심각성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모양으로 진행이 되다가 상대가 B7 엑스를 찔러온 장면이다. 반발하는 수단이 있을 것 같았지만 어떻게 해도 이 시점부터는 –14이하로 좁히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제로도 그 정도의 스코어로 결말이 난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초반에 악수가 눈에 들어온 이후 계속 그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끌려가다가 진 판인데, 이 말은 뒤집어서 얘기하면 흑이 초반 상대의 실수를 붙잡고 끝까지 계속 잘 뒀다는 얘기가 된다. 일본은 단이 낮아도 실력은 엄청 고수들이 많다던데, 이 친구가 좀 그런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최종 스코어를 보니 5승을 한 걸로 봐서는 꽤 잘두는 친구가 맞았던 것 같다)


3라운드 – 통한의 착시

3라운드까지가 오전대국이다. 1승 1패 중이니까 2승 1패로 오전대국을 마무리하면 베스트였다. 그리고 앞에 앉은 상대가 중학생정도로 보이는 일본의 초단이었으니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찌됐거나 1라운드 일본 초단에게 이기고 2라운드 2단에게 졌으니 초단하고는 좀 할만하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조금 있었던 것 같다. 기보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흑을 쥔 나의 기분 좋은 흐름이었다. 일단 하변에는 상대의 돌들로 벽이 쌓여져 있는 상황이었고 나는 여러 둘 곳중의 하나를 선택하면 되었다. 상대가 둘 곳이 거의 없는, 말라죽기 일보직전인 찰나, 나는 결정타를 날려야 할 때가 왔는가 하면서 돌을 집어들었다.

대략 이런 모양이었는데 나는 정의의 칼을 받아라 라는 마음으로 F8에 흑돌을 처억 놓았다. 그리고는 F6과 F7돌을 뒤집고 시계를 누르는데 뭔가 이상했다. ‘?!’ ‘얼레?’ A3 흑돌이 저쪽에서 멋쩍어 하며 손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함을 느낌과 거의 동시에 상대 대국자의 돌을 잘못 뒤집었다는 손짓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A3 돌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F8에 두면 그쪽 세로줄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A3 흑돌을 봤다면 다른 곳에다 뒀을 텐데, 이건 대각 줄이 뒤집어 지면서 상대에게 E8 숨 쉴 구멍을 내줬고 그 바람에 내 모양이 무너지고 말았다. 어이없는 역전패.

대국 종료 후 1승 2패라는 스코어보다도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 없이 싸워야 할 것을 허망한 착시나 삽질로 판을 그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또 한번 나 자신을 자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남은 오후 대국에 최대한 버티려면 지금 나눠주는 밥 잘 먹고 멘탈 잘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을. 이것은 세상의 모든 시합에 임하는 선수들의 숙명이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리치, 하야님과 함께 선수들에게 제공된 도시락을 먹고 잠시 바람을 쐬었다. 대회장 밖 고베의 하늘은 여전히 약간 흐린듯한 잔잔함을 머금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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