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라운드 1번 테이블에 앉았다.
전에는 몰랐는데 대회에서 1번 테이블은 최상위자가 두기때문에 가장 중요한 대국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물론 최상위자는 내가 아닌 케익님이었지만 그 시점에서의 1번 테이블은 뭔가 결승대국같은 느낌이 물씬 나는 테이블이 되었다.
하긴 그 판의 승자가 우승자가 될 것이니 틀린 느낌도 아니었다.
일단 1번 테이블 2자리 중 하나에 앉게 된 것에 대해서는 감사히 생각했다. 그래도 끝판까지는 어떻게 어떻게 헤쳐왔으니 말이다.
이제 단판승부가 되어버린 셈인데 나 자신조차도 이 판의 결과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내 생에 남들의 이목이 집중된 무슨 결승같은 것을 치뤄보는 것은 처음이라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중요한 경기전에 평정심을 찾지 못하는것은 곧 패배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흑을 잡고 첫수를 두었다.
케익님은 직각으로 받고 볼짱은 대각으로 뒤집으면서 익숙한 로즈 형태를 유도했다.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로즈 모양이 익숙하다는 것이지 능숙하다는 뜻은 아니다.
익숙함과 능숙함은 천지차이가 있음을 고수들과 대국을 해보면서 요즘 많이 느끼고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익숙한 모양이 나와야 실수할 확률이라도 좀 줄어들지 않겠는가하고 두어나갔다.
로즈에서 로즈벌쓰로 로즈벌쓰에서 다시 로즈버디 형태로 모양이 진화했다.
온오프게임에서 많이 나왔던 모양이라(전국대회 4라운드 리치님과의 대국에서도 나왔음. 전국대회기 참조) 여기까진 어떤 문제를 삼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상대가 어디선가 틀어올텐데 어디서 틀지가 관건이었다.
볼짱이 좀 연구된 곳에서 틀면 그나마 나을테지만 사람의 일이라는게 그런 경우는 잘 없더라.
역시 상대는 작은 부분에서 약간씩 볼짱이 알고 있는 수순을 비껴갔다. 당연한 일일테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 서서히 출발한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볼짱은 상대가 둬야할곳을 안두고 다른 곳을 둔것 같으니까 계속 그 곳이 신경쓰였다.
즉 그 근방을 둬서 상대가 응수를 안한 곳을 응징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인데 이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비극의 단초였다.
잠시 바둑 얘기를 해보자면 바둑은 어떤 정석 과정에서 상대가 수순 하나를 빼먹거나 비껴가면 그것을 응징하는게 맞고 그렇게 해서 유리함을 가져가는 경우가 매우 많다.
하지만 오델로와 바둑은 완전히 다르다. 상대가 비껴간곳이 악수가 아니고 충분히 둘 수 있는 곳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악수도 아닌데 일반적인 곳이 아닌 곳을 뒀다고 해서 응징(사실 악수가 아니니 응징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안맞는다)을 하면 내가 유리해질거라는 발상 자체가 틀려먹었다는 말이다.
모르는게 약이라고 이럴땐 차라리 바둑을 둘줄 몰랐다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이런 감정들은 필시 승리에 대한 부담감때문에 전에 없이 스물스물 올라왔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초반에는 볼짱이 불리했다. 엄한 곳을 신경쓰다가 대세점, 즉 쌍방의 요충이 되는 곳을 상대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권투로 치면 한대 맞고 다리가 휘청하는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든 클러치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엔딩에서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뭔지 이후 백의 착점은 크게 예상을 벗어나가는 수들은 없었다.
나라면 저기 두지 않을까 하는 곳에 백돌들이 놓여졌다. 일단 최선을 다해서 막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형세는 언제인지 모르게 해볼만한 상황까지는 됐다.
다행스러운 일임에는 맞지만 볼짱이 다행인지 뭔지라는 표현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비껴간 수를 응징해야한다는 발상이 비극의 단초였다면 내가 예상한 곳에 상대가 두어서 형세가 어울린 것이 비극의 절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불리했던 형세가 예상대로 진행되어 만회된 것이 문제라면 세상에 역전승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볼짱에게는 그 상황이 요상하게 머리속에서 변질되어 해석되기 시작했다.
즉 '내 예상대로 상대가 둬서 형세가 만회 됐으니 나는 상대의 예상을 벗어나는 수를 둬야 이길 수 있겠다'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말 자체야 그렇게 잘못된 말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응당 둬야할 곳을 외면해버리게 만든다면?
엔딩에 들어갈 무렵 볼짱은 a7 이라는 여유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우변이 정리가 되면 4귀만 남는 상황에서 a7을 두고 엔딩을 하면 승리할 수도 있을것 같았다.
그때 많이 떨렸던 것 같다.
전에 네웨이핑9단이 조훈현9단에게 초대 응씨배 우승을 내준 이유가 이길 수 있을것 같은 길이 보이는 순간부터 자신을 믿지 못하다가 스스로 무너졌기 때문이다라는 일화를 소개한적이 있다.
볼짱 역시 똑같은, 그러나 굳이 겪을 필요가 없는 일을 겪고 있었다.
a7을 두기 전에 h6을 두고 상대가 끼워넣으면 a7을 두려고 하는 그때, 왠지 상대도 흑의 h6을 예상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상위로 나가려던 손이 멈칫했다.
'상대의 예상대로 두어서 이길 수 있을까. 어울리는 형세로 여기까지 오게 된것도 따지고보면 상대의 응수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볼짱은 h6을 두려다 말고 h4로 향했다. 상대가 거기 둘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상대의 예상을 비껴가서 깜짝 놀라게 만든건 맞았다.
그러나 그 수는 a7이 아닌 a6과 호응하는 수였다.
즉 a7을 봤으면 h6을 두고 상대가 끼워넣기를 기다렸다가 결행하는 것이 승리하는 길이었고, h4를 뒀으면 a6으로 먹여야 하는 것이 올바른 엔딩이었던 것이다.
볼짱은 헛된 망상으로 h4를 둔다음 a7을 두니 최선은 드로(무승부)길 밖에 남지 않았다. 무승부가 나도 우승은 물건너가게 된다.
실전은 설상가상으로 판이 예상치 않게 흘러가자 더 당황을 한 볼짱이 -8의 길로 자멸하고 말았다.
28:36
파란만장했던 볼짱의 최종라운드가 끝난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우승 입단의 목표는 물거품이 됐고 라이스케익님이 5전 전승으로 입단의 문을 뚫었다.
한편 옆테이블에서는 2위,4위 결정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재성님이 예상을 깨고(?) 초등생에게 지고 말았다.
엔딩에서 큰 실수 한번 했다고 하던데 내가 볼땐 그 판 역시 골인 직전에 더 긴장한쪽이 실수를 해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이로써 입단대회 우승은 케익님, 준우승은 그 초등생, 3위는 볼짱, 4위는 재성님이 차지했다.
만일 재성님이 승리했으면 2위는 재성님이 차지했었을 것이다. 그 또한 나름대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케익님의 우승과 입단을 축하한다.
케익님은 무엇보다 그 대국 태도가 우승을 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기가 본 수를 두어나가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게 오프라인 대회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반대로 볼짱은 자기가 본 수를 믿지 못했고 결국 그런 자신 없음이 스스로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서든 고쳐야할 점이 아닐 수 없다.
입단은 더 실력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최종라운드 마지막 한고비를 넘지 못하고 그렇게 무너지니 아쉽지 않을 수는 없었다.
뒷풀이때 모두 모여 서로 건네는 소주잔의 소주가 달게 느껴졌다.
볼짱의 오델로 생활이야 여기서 끝나는건 아니겠지만 내 평생 어떤 입단대회에서 미끄러져서 고뇌한다거나 하는 일이 생길줄은 몰랐다.
바둑 연구생들이 입단에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많이 힘들어 한다는 얘기를 들은적은 있어도 내가 그런 일을 겪다니.
바둑과 오델로는 경우가 좀 많이 다르지만 어쨌거나 사람일은 알 수가 없다.
입단 최종 라운드 기보는 지금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어쩌면 평생 기억날지도 모르겠다.
뒷풀이때 리치님이 그런 기보는 당연히 잊혀지지 않죠, 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응당 뒤따르는 결과물이려나.
이렇게 볼짱의 두번째 대회, 입단대회는 끝이 났다.
3위라는 성적에 일단 감사하면서 다음 세계대회때 제 실력을 좀 더 제대로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래볼 뿐이다.
최선을 다 해보자.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 심판을 보신 단톡방 사범님들, 협회장님 모두 가을 땡볕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한민국 오델로 파이팅!
-볼짱의 입단대회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