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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zzang wrote this on 08/06/2015 22:36 in 전국대회, 참가기

볼짱의 전국대회 참가기 (4)

3라운드 페어링이 시작됐다.

2라운드까지 치룬 상태이니 2승자끼리 만날 것이고 여기서부터는 1패 하는 쪽은 우승이 힘들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볼짱처럼 참가에 의의를 둔 사람이 아니고 우승을 노리는 고수들이라면 이제부터는 한치도 물러설 수 없다.

한판 한판 결승대국 같은 판들이 펼쳐지기 시작할 것이다.

대국장에서 호명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지훈님, 김관윤님..."

'아 저 둘이 벌써 만날때가 됐는가...'

그린님과 리치님의 만남은 사실 둘 다 우승후보니까 스위스룰을 채택하는 한 만남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승자끼리 마지막 라운드에서 만나는 것과 3라운드에서 만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 라운드라면 쉽게 우승이거나 아니거나로 생각할 수 있을테지만,

중간에 만나면 1패를 안는 사람의 자력 우승은 불가능해지니까 남은 라운드가 부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라는 것이 원래 그런게 아닐까 싶다.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나야 하고,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하고, 승자는 앞으로 나아가고 패자는 뒤로 밀리는 그런 승부의 본질.

물론 그린님과 리치님같은 사람들은 그런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볼짱은 그 둘이 착석을 하면서 내뿜는 비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굳어있다고 할 수도, 편하다고 할 수도 없는 그 표정.

결승과도 같은 판이므로 저 두 사람중 한명은 어쩔 수 없이 이번 라운드에서 우승권으로부터 멀어질지 모른다,

라는 생각을 하며 호명된 자리에 앉았는데 앞을 바라보니 볼짱의 3라운드 대국상대는

'여고생...!'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안경을 쓴 그 여학생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국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언가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것 같았다.

볼짱은 묘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고등학교 졸업 이후 이십여년간 교복을 입은 여학생을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적도 없거니와,

여학생과 뭘해서 이겨야 하는 행위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연약해 보이는 여학생을 내가 이겨야하나... 져도 문제지만...'

아까 초등학생과 둘 때의 부담감이 똑같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말 수가 별로 없을 것 같은 얌전한 외모의 여학생은 대국이 시작 되자 그 외모만큼이나 얌전히 돌을 뒤집었다.

대회에 참가한 사람중 여성은 1/5정도 였었고 대부분 학생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모두가 다 얌전히 뒀던 것 같지는 않다.

"안녕! 몇살이야? 오늘 이모 생일이야! 호호호..."

"이모한테 생일 선물 뭐줄거야? 까르르..."

저편에서 수님이 어린 학생을 앞에 앉혀놓고 대국 시작전 대화를 하고 있다, 라고 하기에는 혼자 일방적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상대인 그 어린 학생은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넉살 좋은 수님. 대국전 저렇게... 저것도 전략일까. 시작하기 전에 상대 혼빼놓기...'

볼짱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백돌을 집어들고 대각으로 착점을 했다.

상대 여학생은 스네이크의 옆칸인 히스로 빠졌고 볼짱은 침니 오프닝으로 유도 했다.

무언가 1라운드와 비슷한 출발이었는데 그때는 기보 작성이나 시계 작동 등이 어색할 때고 지금은 그런것은 사라졌으니 승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볼짱은 대국 내용이나 결과와 관계없이 이 여학생과의 대국이 쉽지 않았음을 먼저 밝혀야할 것 같다.

모든 대회 참가자들이 다 진지하게 대국에 임하지만 이 여학생은 특히 더 진지했다.

그렇게 생각된 이유는 그 여학생이 너무 대국에 집중을 하다보니 초시계 누르는 것을 자꾸 잊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좀 미묘한 부분인게 상대가 착수를 하고 초시계를 누르지 않으면 내가 생각하는 시간에 그 학생의 시간이 흐르게 된다.

결국 시계 누르는 것을 자주 잊는다는 것은 볼짱 입장에서 유리한 일일 지 모르겠으나 만약 그런식으로 만에 하나 시간승이라도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솔직히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상대가 시계 누르는 것을 잊을때마다 볼짱이 손가락으로 시계를 가르키며 누르도록 알려주곤 했는데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뭔가 내가 상대를 돕고 있다는 괜한 여유가 생기고 말았다.

게다가 그 여학생이 뭐가 마음에 안드는지 계속 얕은 신음을 내며 괴로워하면서 두니까 사실 대국 내용은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내가 유리하다는 착각을 하고 있던 것이다.

엔딩에 다다를 무렵 볼짱은 형세가 만만치 않음을 알고 가슴이 순간 내려앉았다.

'볼짱. 이런 바보 같은 녀석!'

죽어라 둬도 이길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처음 보는 상대 앞에서 알량한 여유를 부리고 있던 내 자신이 매우 한심했다.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보니 정말 다행스럽게도 진것은 아니었고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어보이기는 했다.

남은칸은 여섯칸. 이 정도라면 최선수를 찾을 수 있겠지.

'확실한 길을 찾자. 내가 제일 많이 뒤집을 수 있는 곳은 어디지...'

볼짱은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딴에는 안전한 길을 찾는답시고 상대 돌에 붙이는 수를 착점했다.

그런데.

내 착점을 본 여학생이 잠깐 그 수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 앗...!'

그렇다. 결과적으로 볼짱은 최선수가 아닌 최악수를 둔 것이다.

고백하자면 내가 뒤집는 것만 생각했지 상대가 두었을때 내 돌의 반절이 날라가는 수를 간과했던 것인데, 후에 옆에서 지켜보던 영구님이 한참 생각하다가 거기 두는거 보고 순간 뒤통수를 갈기고 싶었다고 했다.

볼짱이 그 정도로 악수를 두었으니...

숨이 가빠진 여학생의 손놀림을 뒤로 하고 볼짱은 귀신에라도 홀린 심정이 되어 남은 칸을 마저 채워나갔다.

마지막 칸이 채워지고 돌이 다 뒤집어지고 나니 흑백이 서로 얽히고 섥혀 돌계산이 쉽지 않았다.

뭔가 흑돌도 많고 백돌도 많아보였다.

뭐지 이건... 졌을지도 모르겠다 하고 있을 때 심판인 홍성욱님이 오셔서 돌 갯수를 세어주셨다.

"33...33대 31 아... 아깝지만 31개고 여기가 33이네요."

여기라고 하는 쪽은 볼짱 쪽이었다.

신승(辛勝).

바둑에서는 간신히 어렵게 반집을 이기거나 한 경우를 신승이라고 표현한다.

매운 승리라는 것인데 사실 유리하던 판을 이렇게 만들었다면 이겼다하더라도 사범님들에게 혼나야 한다.

아... 간신히 이긴건가.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의 여학생을 앉혀두고 볼짱은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흡연구역으로 향했다.

무언가 부끄러워서 자리에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이겼지만 진것 같은 느낌, 다소 착잡하면서 뭐가 뭔지 모르겠는 느낌을 가지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볼짱 옆에는 리치님이 함께 있었다. 리치님과 그린님의 결승전이라고해도 손색 없을 대국에서 리치님이 이겼다고 했다.

리치님은 옆에서 계속 스맛폰으로 지브라를 보면서 다음 대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음 대국 준비?'

"예에... 이번에 3승자끼리 만날테니 협회장을 만날 가능성이 높아요."

"으음... 그렇겠네."

"만나게 되면 상대가 이렇게 둬올거고... 저는 그러면 이걸 쓸겁니다."

리치님이 스맛폰으로 볼짱 수준에서는 척 봐도 난해해보이는 어떤 오프닝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때 아 대회에서 우승하는 길은 험난하면서도 각고의 노력이 필요함을 느꼈다.

리치님이 그 짧은시간 스맛폰으로 바삐 지브라를 눌러보며 다음 대국을 준비하는 모습은 무언가 간절해보이기까지 했다.

아마도 그린님이라는 큰 산을 넘었으니 우승에 대한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시 대국장으로 향하면서 볼짱은 리치님을 격려하며 스스로 어찌됐든 2승을 거뒀으니 남은 대국이나 최선을 다해보자 하고 내려갔다.

그런데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국장에 4라운드를 치루러 내려가서 볼짱은 자신의 상대를 몇번 확인해야했다.

볼짱의 4라운드를 대국상대는 바로 리치님이었던 것이다!

'왜 어째서 2승1패인 내가 3승인 리치님과...'

리치님은 내심 놀랐는지 어쨌는지 예의 그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고 볼짱도 할 수 없이 착석해서 흑돌을 집었다.

이미 바로 옆에서는 협회장님과 수님, 두 3승자끼리 대국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번 대회 우승자를 향한 거센 파도가 대국장을 덮치고 있었다.

마지막에 파도를 헤치고 뭍으로 걸어 나오는 사람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계속-

다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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