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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zzang wrote this on 03/22/2016 20:55 in 오델로, 세계대회, 참가기

볼짱의 세계대회 참가기 (2)

올림픽 첫경기를 치르러 나가는 선수의 심정이 이러할까.

겁이 나는 것도 아니고 자신감에 넘치는 것도 아닌, 설렌다고 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떨리지도 않는 묘한 긴장감.

결과를 알 수 없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마주하기 직전에는 자연히 그러한 감정이 드는 것이리라..

게스트하우스를 나와 코너를 돌면서 그래도 하늘이 도우면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뻔뻔한 기대를 잠시 했었던 것 같다.

늘 이날의 아침처럼 무언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세계대회 기보용지.

마지막 60이라는 숫자를 기입할 때 나는 어떤 기분일까.

참담한 기분으로 스코어를 적게될까, 아니면 감격스러운 흥분으로?

내일까지 이틀동안 총13개의 기보를 적게 될 것이다. 승부에 관계없이 좋은 기보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많은 고수들은 얘기한다.

물론 좋은 얘기다. 하지만 좋은 내용으로 지는 것 보다는 안좋은 내용으로 이기는 것이 낫지 않는가 하는 것이 기보지를 마주한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수는 상대의 실수를 바라고 고수는 상대의 정수를 바란다던데 나는 쪼잔(?)하게도 상대가 알아서 실수해주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수되기는 틀린 듯 하다…

드디어 1라운드 시작. 1라운드 상대자는 전야제때 미리 추첨을 통해 공개된다.

약체로 분류되는 프랑스 여류여서 그다지 대비할 것도 없었지만, 필시 상대방도 그랬을 것이다. 듣도 보도 못한 한국의 아무개 선수를 프랑스 선수가 뭘 알고 미리 준비할 수 있었겠나.

결국 서로 어떤 대비를 할 필요가 없는 상대끼리 1라운드에서 만난 셈이다.

캐롤라인 니콜라스라는 이 아주머니는 솔직히 중년을 넘어서 마음씨 좋은 할머니에 가까워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처음 마주하는 외국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떨면서 시작하지는 않게됐던 것 같다.

미리 연구한 노쿵 오프닝이 나왔지만 상대가 금방 다른 곳에 두는 바람에 몇수 지나지 않아 모르는 길로 가게 되었다. 그래도 첫판은 어떻게든 건져야 한다는 신념으로 선수 방어 악화 개념을 살려 열심히 두어나갔고 그러는 와중에 약간 편해지는 흐름으로 종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마지막 수까지 다 두고 나니 다행히 내가 48:16으로 이길 수 있었다.

나는 아 세계대회에서 0승은 일단 면했구나 하는 안도감을 가지고 대국장을 빠져나가 담배를 물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도 그 근처에 와서 덤덤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다. 방금 승부를 마친 외국인 두사람이 그러고 서있으니 참 어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눈이 마추쳤으니 뭐라도 말을 해야할것 같지만 딱히 할말도 없는 그런 상황.

나는 상대가 프랑스 여류라는 것에 착안, 질문을 하나 생각해냈다. 프랑스의 유명선수 카시와바라한테 종종 배우기도 하는지를 좀 물어보고 싶었다. 다른 나라는 스터디나 모임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했던 터였다.

그래서 “카시와바라…”라고 운을 떼는데 그녀가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Yes… he is my husband.”

“?!”

그렇다 그녀는 바로 프랑스의 유명 오델로 선수 카시와바라의 아내였던 것이다.

그녀는 오델로 기력이 그렇게 세지는 않았지만 남편과 함께 세계대회를 여행삼아 다니면서 게임도 즐기고 내조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깜짝 놀란 나머지 더 이상 말은 못하고 엄지손가락만 치켜 세우고 다시 대국장으로 들어갔다.

내가 알고 물어본게 아닌데 공교롭게도 그런셈이 됐으니 뭔지 모르게 오늘 재미난 일이 벌어지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어코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첫판이야 어떻게 이겼지만 연승은 설마하고 기대도 안했는데 2라운드 마저 이겨버린것이다!

상대는 잘 모르는 폴란드 선수였지만 준비한 로즈 오프닝이 나온게 큰 도움이 되었다. 중후반 무렵 상대가 변에서 좀 이상한 수를 두었고 그때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48:16으로 무난했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나의 승리.

그리고 나서 전광판에 뜬 중간 순위표를 보니 세상에, 당당히 내가 전체 5위!

물론 단 2판만을 가지고 매긴 순위라 별 의미는 없지만 나로서는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2라운드를 거친 현재 나는 타카나시, 임레 리더랑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스에쿠니와 보라시 같은 사람들을 발밑에 두고 있지않은가!

그 때 나는 분명히 오래가지 못할 이 평생의 몇분을 즐기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페어링이나올 때까지 전광판을 보고 보고 또 보며 서있었다.

아마도 내 생애 가장 감격스러웠던 십여분이 아니었었나 싶다.

이 한장의 사진.

이번 세계대회 참가하면서 찍은 수많은 사진 중 단 한장을 꼽으라면 단연 이 사진을 꼽을 것이다.

세계 탑 랭커 미국의 벤 실리. 오델로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모를 수 없는, 강력한 우승후보중 한명이다.

그런 세계 최고수랑 내가 두게 될거라고는 진짜 꿈에도 생각 못했다. 시스템상 비슷한 승수를 가진 사람끼리 붙게 되니까 내 객관적인 실력상 세계 탑 플레이어와는 붙을 확률은 0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반 운좋은 2연승으로 벤 실리와 대국하는 횡재를 얻다니. 이것은 가문의 영광임과 동시에 이 한판만으로 세계대회 참가 본전은 뽑은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란게 참 간사하다. 두는것만으로도 영광이었던 벤 실리였지만 초반 나를 얕봤는지 어쨌는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건성건성(?) 착점을 하는 것을 보니 슬몃 본떼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집중하면서 신중하게 두고 있는데 웬걸, 그러다보니 형세가 중반까지 나쁘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갑자기 상대도 심각성을 느꼈는지 자리에 착석해서 장고하기 시작했다.

‘오오, 내가 설마 사고 한번 치는건가?’

벤 실리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은근슬쩍 통쾌하기도 하면서 뭔가 사건이 터지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하자면 마지막 수가 패스나는 것을 못보고 난 내가 패리티를 가지고 있는줄만 알았다. 그렇게 계산을 해보니 최소 무승부가 나오는 것 아닌가. 그때 무지하게 흥분했었는데 마지막에 패스가 나는 바람에 결국 38:26으로 지고 말았다.

사실 져도 본전인 판이었으니 특별히 기분 나쁠 것은 없었지만 내가 이길수도 있었다고 생각을 하니 매우 아쉽긴 했다.

후에 안일이지만 내가 이기는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다만 중반에 -2로 따라붙은적은 있었는데 그때부터 벤 실리가 장고를 했던것으로 보인다.

주목할만한 것은 세계 탑 정도와 두게 되면 할만하다 생각해서 열심히 뒀는데도 무난하게 지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불리한지조차 깨닫지도 못한채 그냥 원사이드로 지는 코스를 밟게 되니 그 수준 차이에 입이 벌어질 따름이다.

3라운드 2승1패로 오전 대국을 마친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 대국을 맞이했다.

하지만 사실 여기서부터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일들이 가득하다.

첫끗발이 개끗발이라는 말이 있던가. 내가 딱 그 짝이었다. 벤 실리에게도 이길뻔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으니 상대적으로 다른 선수들은 그렇게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정신나간 상태였던 것 같다.

결국 프랑스 대표 아르노를 만만히 보고 덤비다가 제대로 얻어맞았다. 힘 한번 못써보고 51:13의 제법 큰 스코어차로 무릎을 꿇고 말았는데, 무언가 타이트하게 죄여오는 느낌으로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프랑스에서 손에 꼽는 강자를 뭘 보고 할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이때부터 슬그머니 운빨이 다해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가장 참담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던 5라운드. 스웨덴 대표에게 초반에 보기좋게 걸려들었다. 헤어나올 수 없는 끔찍한 상태였다.

그 스웨덴 대표는 점수를 최대한 올릴 기회가 왔다는 듯이 어디 둬도 이길 상황에서 가장 돌을 많이 뒤집는 곳을 생각하고 두고 생각하고 두고 했다.

그 한수 한수가 두어질 때마다 온몸에 비수가 꼽히듯 너무 괴로웠고 하나라도 더 뒤집는 수를 발견하려고 장고를 하는 상대 선수의 모습에서 얄미움과 배울점이 동시에 느껴졌다.

최종 56:08이라는 부끄러운 스코어를 받아쥐고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국장 밖은 인상파 화가의 그림에서나 나올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인데, 안은 피튀기는 승부의 장이었다. 승부란것, 패자에게는 정말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승부를 회피하지 말고 계속 해야만하는 이유는 인생 자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하는 어떤 승부의 속성을 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6라운드쯤 되니 마음만은 1승을 더 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체력이 점점 바닥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체력이 달린다는 얘기는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된다.

중국계로 보이는 싱가폴 대표(하긴 싱가폴이면 어지간하면 중국계겠지만)를 마주하고 젖먹던 힘을 다해 싸워보리라 하며 돌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오전같지 않은 집중력을 가지고 객관적인 전력이 나보다 위인 상대와 맞서 싸우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크게 질 것 같은 마무리 단계에서 끝까지 어떻게든 비틀어 보고 싶었다. 엑스를 찌르고 상대가 응수한 다음 다시 반대쪽 엑스를 찌르면서 최대한 뭐가 뭔지 모르게 만들어보았다. 돌갯수가 의외로 별로 차이가 안나는 것 같은데 상대 선수는 눈하나 꿈쩍않고 척척 응수를 했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계산을 해보니 34:30으로 패배.

아쉬웠지만 그래도 불리한 판을 죽을힘을 다해 끝까지 상대를 괴롭혔다는 것에 만족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는 아무리 해도 최소 34로 이기는 길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표정 하나 안변하고 그렇게 둘 수 있었던 걸까.

세상에는 참 많은 고수들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는 수 밖에.

첫째날 마지막 7라운드다. 2연승 후 4연패 중이었으니 어떻게든 이 판을 이겨 3승은 하고 다음날로 넘기고 싶었다. 체력은 바닥난 상태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폴란드 대표 아저씨 사실 좀 음침한 구석이 있어보였던 것이 화장실이나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어눌한 영어로 이런저런 말을 붙이는 것이었다.

‘이겼느냐, 몇승했느냐, 난 몇승밖에 안된다, 여자만 이기고 있다’ 같은 얘기를 내게 하니까 은근슬쩍 하수끼리의 동병상련 같은 감정이 생겼다.

그리고 결국 7라운드에서 공교롭게 마주하게 됐는데 그런 어설픈 상대에 대한 감정이 결국 사단을 내고야 말았다.

국면은 엔딩까지 나의 필승 국면이었다. 음침한 폴란드 아저씨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가 한 수 두고 내가 한수 두면 다시 죽을듯한 표정과 신음으로 체념하듯 다음 수를 놓았다. 내가 꽤 유리한 상황에서 상대도 체념했겠다, 체력은 고갈된 상태니 빨리 승부를 끝내고 싶은마음에 툭툭 둬나가는데 갑자기,

“Thank you~~~~”

“?!!”

큰 소리로 쌩큐를 외치며 엑스에 자기 돌을 떠억 놓는 폴란드 대표. (물론 세계대회에서 저런식의 소리치는 태도는 비매너임이 분명하겠지만)

‘아뿔싸!’

몇칸 안남았으니 아무곳에 둬도 이길 줄 알고 두다가 상대가 노리는 단하나 엑스를 열어주고 만것이다.

‘이런 바보 멍청이! 끝까지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를 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음침한 폴란드 아저씨는 언제 죽는 소리를 냈냐는 듯이 룰루랄라 마지막 돌을 뒤집고 있었다.

결과는 34:30으로 나의 역전패. 패한 것도 패한것이지만 무언가에 홀린듯 이렇게 승리를 목전에서 상대에게 넘겨주니까 망연자실 그 자체였다.

후에 들은 얘긴데 바둑에서도 그렇고 엄살을 피우는 스타일의 플레이어들이 있다고 한다. 그게 좋은 전략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돌이켜보니 상대는 엑스 하나만이 희망이었으므로 그 노림을 가져가기 위해 최대한 엄살을 피우면서 내 방심을 유도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상대의 계략에 순진하게 넘어간 내가 바보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하나 덧붙이면 세계대회 같은 곳에서 필요이상으로 애써 친한척하며 이쪽 테이블 분위기를 다른 테이블 대비 은근슬쩍 진지하지 않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일단 경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런 것이 긴장을 늦추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으니.

오전에 기세 좋게 벤 실리와 맞짱까지 뜬 날의 결과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결과를 가지고 숙소로 돌아와야했다. 물론 둘째날 잘하면 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정돈 되는 것이 아니다.

온몸에 힘이 빠진 채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가는 그 길이 참으로 쓸쓸해 보였다. 늦가을의 낙엽은 거리에 수북한데 비가 자주 내리는 곳이니만큼 축축한 가을 내음이 온 몸을 감쌌다. 영국 특유의 흐린 하늘이 내 기분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았다.

머나먼 땅에 승부를 하겠다고 와서 정신 없이 뒹굴고 있는 나 자신이 스스로 외롭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큰 기대를 하고 온 것은 아니지만서도 나름대로 떳떳한 결과를 얻고 싶었는데… 내일 남은 판에서 뭐가 됐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둠마저 축축하게 내려앉은 캠브리지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계속-

다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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