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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zzang wrote this on 05/10/2018 00:53 in 오델로, 일본명인전, 참가기, 후기

일본 명인전 참가 후기 (4)

7라운드 – 허무한 낙마

내가 후기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라면 마지막 라운드는 대역전 드라마 결말로 마무리 짓던가 최소한 상대를 벼랑 끝까지 몰고갔다가 역전당하면서 다음을 기약하는 결말로 마무리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고 어찌보면 비정하기까지 했다.

마지막 나의 상대는 스마트한 인상의 일본 2단이었는데, 컴퓨터 관련 종사자이거나 금융업계 종사자 같은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대국 전 멋쩍게 웃는 모습이 선해보였기 때문에 위압감 같은 것을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일단 평작이라고 하는 3승을 챙긴 상태였기 때문에 한번 더 이겨서 4승을 하면 대성공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직각으로 흑의 첫수를 받았다. (그러고보니 이번 7라운드 중 6번인가를 백을 쥐고 두게 된 것도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다)

그가 들고 나온 오프닝은,

Horse. 대표적인 오프닝 중 하나이지만 의외로 시합때는 마주한 횟수가 많지 않은 오프닝이다. 나는 위의 그림에서 보통 D6의 정석대로 응수를 안하고 F5로 비껴가는 수를 자주 둔다. 정석대로 응수를 하다보면 아주 외우지 않는 이상 실수가 나오기 쉬운 모양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두곤 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흑이 이런 모양으로 받자 평상시처럼 F3으로 가던 손이 멈칫했다. 암만해도 F3을 두면 D6이 너무 눈에 보였다. 결과론이지만 2라운드에서 겪었던 일처럼 늘 두던 곳이 안좋아 보이는 현상이 망령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 것이다. 수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그렇지 왜 시합 때 더 좋은 수를 찾겠다고 뒤늦게 고민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F3 다음 D6은 최선도 아니다, 차선 정도)

‘장고 끝에 악수’라는 격언의 표본. 고민하다 G4로 빠졌고 상대에게 F3을 맞고는 초장에 휘청거렸다. 그리고 상대의 침착한 응수에 계속 모양을 만들지 못하고 무너져갔다. 어떻게든 추격을 해보려고 사력을 다해봤지만 허사였다. 하나마나한 소리겠지만 일본 기사들이랑 둘 때 초장에 틀려버리면 참 답 없이 수순이 흘러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Horse) 오프닝에서 허무하게 낙마를 하고 나는 3승으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승수야 실력대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이렇게 대표적인 오프닝도 틀려버리나 싶은 생각에 얼마간의 자책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종국 후 그의 오델로 퀘스트 아이디를 물어봤더니 나와 비슷한 1900대의 레이팅을 보유하고 있는 기사였고, 아 못이길 상대도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또 한 번 아쉬웠다.

나름 화려한 마지막 라운드를 기대했건만 현실은 준비 안 된 자에게 냉혹한 것이었으니.


뒷 이야기

1.후쿠치5단

타카하시와 함께 양대 어린이 초고수라고 불리우는 후쿠치 5단의 대국 모습이다. 꼬마 괴물 후쿠치 5단의 대국은 늘 사람들의 관심을 사는 것 같았는데 이 판은 인터넷 중계까지 되는 판이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저기가 아마도 2번 테이블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판이 후쿠치가 둔 7판중 1패를 기록한 판이다. 그 주변인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키요노부와 타카하시의 표정이 재미있다. 좌측으로 야마카와와 카미쿠라의 모습도 보인다.

에피소드 하나.

후쿠치가 복도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그의 엄마가 닦아주며 괜찮다고 위로하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하야님이 왜 울어요라고 물으니 오늘 많이 져서 그래요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한 3패 정도 해서 저러나 싶었는데 알고보니 6승 1패하고 순위 결정전에서 한 번 더 진 것이 분해서 우는 것이었다고. 그게 많이 진거면 나같은 사람은 도대체 뭐냐.

에피소드 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내 옆에서 후쿠치도 볼일을 보는 것이다. 그 때 내가 왜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슬그머니 후쿠치의 볼일 보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이런 아기가 오델로를 그렇게 잘 둔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됐다는...


2. 결승전

결승전은 7승 전승자 2명 - 시미즈 5단(당시)과 타카하시 5단(당시)의 대결이었다. 알다시피 타카하시는 초등학생이지만 이미 전년도 세계대회 준우승자였고 오델로 퀘스트에서도 전체 1위를 달리고 있는 초초고수 아닌가. 그래서 사상최초로 어린이 일본 명인이 탄생하는 모습을 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나 뿐 아니라 모여 있는 사람 모두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초반에 두 선수가 빠르게 오프닝을 두어가니까 와아 하는 탄성이 터져나온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잠시 후 이번에는 와아가 아니라 와아아아아 하는 탄성이 크게 들리는 것이었다. 해설을 하던 타카나시와 스에쿠니가 바삐 뭐라뭐라 떠드는데 하야님께 왜그러느냐고 슬쩍 물으니 오프닝에서 타카하시가 수순 하나를 빼먹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두 번째 탄성은 많은 이들의 탄식이었는지도.

결과적으로 오프닝에서 수순 하나 틀리는 바람에 타카하시가 일찌감치 비세에 몰리는 판이 됐고 시미즈 5단은 유리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신중하게 두면서 국면을 마무리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처럼 결승전은 의외로 싱겁게 승부의 추가 초반부터 기울었는데 어쨌거나 그 바람에 어린이 일본 명인의 탄생은 좀 뒤로 미뤄지게 됐다는 것. 하지만 이 기세라면 겨우 1년 정도 뒤로 늦춰진 일일지도 모른다.


3. 단위 수여

이번 명인전에 참가한 외국인 선수는 나까지 4명이었다. 하야님, 리치, 볼짱 그리고 대만의 타이완찬. 하야님은 이미 일본 단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외하고 3승 이상을 한 외국기사에게는 단증이 수여됐다. (사실 단증을 따는 것은 깊게 생각 안하고 있었는데 2승 했으면 나는 그냥 남들 단증 받는거 구경만 할 뻔 한건가 생각하니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3승 볼짱은 초단, 4승 리치는 2단, 5승한 타이완찬은 3단을 받았다. 사진은 리치가 2단증을 받는 장면이고 단증을 수여하는 여성은 오델로의 창시자 故하세가와 고로의 미망인이다.

수많은 사람 앞에 나가서 무언가를 타고 박수를 받는 일이 실로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난다. (심지어 외국인들 앞에서) 어색했고 떨렸지만 또 나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4. 고베규

대회가 끝난 다음 날 고베에 왔으면 유명한 고베규를 먹어야지 하고 일행이 호기롭게 고베규 가게에 들어섰다. 하지만 내 머리털 나고 그렇게 비싼 고기는 처음 보았다. 갓난아기 손바닥 만한게 수십만원 정도였으니...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인터넷 검색을 한 후에 비용이 감당될만한 고베규집을 찾아서 식사를 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맛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지금 솔직히 그 맛이 기억나는 것이 아니고 저렇게 철판에다가 척척척 고기를 굽고 썰고 향신료를 뿌리고 하는 것만 기억난다. 이 얼마나 간사한 혀란 말인가.


5. 오델로 여행자

신고베역 뒤편 고베산 정상에는 누노비키 허브 가든이라는 곳이 있었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허브 가든 산책도 하고 테라스에 앉아서 차도 마셨다. 아직은 꽃이 덜 피었던 때라 볼거리가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기자기한 일본 특유의 정원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월요일 오전이어서 사람들도 별로 없었기에 그야말로 한적한 일본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탁 트인 고베의 전경은 시원했고 산 정상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은 상큼했다. 절로 힐링이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우리의 취미는 오델로 여행이 된 것이 아닌가, 그냥 여행이 아닌 오델로 여행 말이다. 매년 세계 곳곳에서 대회가 열리는 게임도 흔치 않은데 시간과 여건이 허락할 때 어디든 참가해서 대회도 치르고 리프레쉬도 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취미가 또 있을까 싶다.

그러니까 오델로 여행을 하는 우리는 이미 오델로 여행자들이다. 그리고 서로의 여행을 공유하는 우리는, 오델로라는 게임을 매개로 세계지도를 그릴 수 있는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동료들이자 친구들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훗날 나이를 먹고 늙어 허리가 구부러져도 체력이 허락하는 그 날까지 오델로 여행을 멈추고 싶지 않은 이유이다.

-2018 일본 명인전 참가 후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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