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 Oth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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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zzang wrote this on 07/26/2015 in 오델로, 소설, X-square, 들장미 소녀

들장미 소녀 (2)

어제 비가 와서인지 눈이 시릴 정도로 파아란 하늘에 뭉게 구름이 솜사탕처럼 피어올랐다.

적당한 속도의 짧은 바람이 지수의 머릿결을 훑고 지나갔다. 귀밑을 스치는 머릿결이 살짝 그녀의 마음처럼 간지러웠다.

지수는 무언가 잔잔한 쓸쓸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그러나 애써 명랑한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듯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시외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는 조급한 코스모스 두어송이가 바람에 산들산들 가을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잘 계시겠지...’

지수는 손에 들고 있는 장미 다발에 코를 묻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어디선가 매서운 겨울의 한기가 훅 하고 날아와서는 대문을 때리고 지나갔다.

대문 앞에는 어린 지수가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품속에 파묻고 있었다.

‘씨이. 이제 집에 들어가지 않을테야.’

어린 소녀는 무언가 단단히 속이 상한 듯 두 주먹을 꼭 쥐고 다짐을 했다. 손에 쥔 신발주머니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막상 다짐을 하고 보니 자신이 슬픈 동화속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아 스스로 너무 불쌍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얘, 얘. 너는 이 집에 사는 꼬마 맞지?”

낯선 목소리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드니 지수 앞에는 낯선 남자가 서있었다.

“아아 울고 있었나. 저런.”

지수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남자는 흠칫 놀라며 주머니의 손수건을 찾았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뽀얀 피부에 생글생글한 눈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미남이라는 느낌을 들게 했지만, 방해꾼이라고 생각한 지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 나는 이 앞집에 사는 아저씨야. 앞집 작은방에 얼마전부터 살고 있지. 근데 왜 집에 안들어가고 이러고 있니? 추운데 감기 걸리겠다. 열쇠가 없니?”

손수건을 건네주며 남자는 지수 옆에 같이 나란히 앉아서는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

“저런. 속이 단단히 상한 모양이구나. 그래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남자는 아무말 안하고 지수 옆에 앉아서 그저 차가운 겨울 저녁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아저씨 집에 들어가세요. 감기 들어요.”

한참을 아무말도 안하던 지수가 모기만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아 착한 아이로구나. 아저씨 감기 걸릴까봐 걱정을 다 해주고. 난 네가 집으로 들어가면 들어갈거야. 염려마.”

“저는 집에 안들어간다니까요.”

지수는 품 속에 얼굴을 더 깊게 파묻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래 맘대로 하렴. 그런데 말이다, 아저씨가 살아보니까 집이 있는건 너무나 고마운 일이더라. 이렇게 추운날에도 집이 없는 사람은 지하보도에서 신문지를 덮고 자야한다고... 무섭지?”

길에서 자야한다는 말에 어린 지수는 흠칫 놀랐다. 품에서 고개를 꺼내들어 남자를 보니 남자는 빙긋이 웃으며 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얼른 들어가. 엄마가 기다리실거야.”

“...엄마 없어요. 집에 있는건 새엄마야.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관심도 없을걸.”

남자는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인자한 미소를 띠면서 지수에게 얘기했다.

“그렇구나. 그래서 집에 있기가 싫은거구나?”

지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네가 학교갔다가 집에 들어가기전에 아저씨 집에 들러. 앞집이니까 집에 온거랑 크게 다르지도 않으면서 놀다 갈 수 있으니까. 괜찮지?”

한쪽 눈을 찡긋 하며 말을 하는 얼굴이 우스워보여서 지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웃으니까 귀여운 꼬마 아가씨네.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들어가고 내일부터 아저씨 방으로 놀러와. 자, 약속”

어린 지수의 눈에는 새끼손가락을 내민 남자의 모습이 누구보다 따뜻해 보였다.

다음날 방과후 지수는 남자의 방앞에 찾아가 문을 살짝 두드렸다.

문을 연 남자는 반가운 얼굴로 지수를 맞이했다.

“왔구나. 어서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선 곳을 방문한다는 궁금함이 지수를 들뜨게 했다. 비교적 깨끗하게 정돈된 남자의 자취방이었다.

그때 지수의 눈에 침대 밑에 놓여진 초록색 판과 바둑알 같은 것들이 보였다.

“아저씨, 이거 뭐에요. 오목이에요?”

남자가 지수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응? 아아 그건 오목이 아니야. 오델로라는 거야.”

“오델로?”

“응 오델로. 외국 장기 같은거지. 왜? 관심있니? 가르쳐줄까?”

지수는 아버지의 나무로 된 바둑판은 본적이 있어도 초록색판은 처음 보는 터라 마냥 신기했다. 무엇보다 한여름 쭉쭉 뻗은 나뭇잎 같은 선명한 초록색이 마음에 들었다.

“네. 어떻게 하는거에요?”

남자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자세를 고쳐 바로잡았다. 둘 사이에 오델로 판을 놓고 지수에게 오델로의 룰을 설명해주었다.

“자, 여기 흑돌 보이지 이게 백돌을 이렇게 포위를 하면 뒤집을 수가 있어. 가로 세로 대각으로 말이지. 한번 따라해봐.”

지수가 여러 가지 모양을 늘어놓아도 뒤집는 곳을 정확히 짚으면서 곧잘 따라하자 남자의 표정은 한층 더 밝아졌다.

“좋아. 아주 잘하는데? 머리가 좋구나 너.”

“저 머리 좋다는 얘기 처음 듣는데...”

“아냐. 아저씨는 딱 보면 알아. 너는 머리가 아주 좋아. 이렇게 바로 따라하는거 의외로 어렵다구.”

칭찬을 들은 지수는 신이나서 더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좋아... 그러면 학교 끝나고 매일 아저씨에게 1시간씩 오델로를 배워보자. 그러면 몇 달 후에는 아주 잘할 수 있을거야.”

지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배우게 됐다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학교와 집에서 늘 혼만 나던 자신이 잘할 수 있는걸 발견했다는 점이 기뻤다.

그 후로 아무리 추운 날이어도, 비바람이 불어도 눈이 펑펑 쏟아져도 지수는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남자에게 오델로를 배웠다.

처음에는 뒤집는 것부터 시작했지만 이내 오델로 한판을 룰을 어기지 않으면서 둘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남자가 지수에게 말했다.

“지수는 아주 영특해서 잘 두는 아이니까 이제부터는 조금 다른걸 배워보자. 오프닝을 가르쳐줄게.”

“오프닝이요?”

“응 시작할 때 어떻게 출발하면 좋을지 아주 잘두는 아저씨들이 만들어놓은 추천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될거야.”

남자는 오델로 판에 흑돌 몇 개와 백돌 몇 개를 주욱 늘어놓았다.

“이게 바로 아저씨가 너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오프닝이다. 이 다음에 어딜 두게 되냐면...”

지수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 전에 손을 한 곳에 갖다대며 말했다.

“여기...”

남자는 흠칫 놀랐다. 지수가 가르킨 곳은 최선수(정수)였던 것이다. 영특한 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정도로 성장 속도가 빠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 아이 기재(棋才)가 있어! 혹시 우연히 맞춘걸까’

남자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좋아. 맞췄어. 굉장한데. 그러면 다음 수도 맞춰볼래? 이 다음엔...”

“여기 둬야할 것 같아요.”

역시 이번에도 지수가 가르킨 곳은 최선수였다. 남자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똑똑하구나 우리 지수. 좋았어. 이건 로즈라는 오프닝이야 이것부터 마스터 해보자.”

“로즈요?”

“응 장미라는 뜻이지. 만든 사람 이름이 로즈라서 붙었다지만 어쨌든 장미처럼 예쁜 우리 지수에게는 로즈 오프닝부터...”

싱글싱글 웃으며 혼자 둬보는 지수를 보며 남자는 잠시 창가에 손을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돌이켜보면 서울에 홀로 상경해 많은 고생을 하며 지낸 세월이었다. 막노동과 배달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힘들게 공부를 해오느라 몸과 마음은 늘 피곤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델로라는 재미있는 취미이자 친구가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 그의 눈앞에는 지수라는 꼬마 제자까지 나타났으니 세상이 그렇게 외로운 것만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슬몃 지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지수야.”

“네?”

“어제 아저씨가 보여줬지. 오델로 돌이 외롭게 딱 하나만 남았는데도 마지막에 역전하는 모양.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얘기 했었지?”

“네!”

“그러니까 이제부턴 아무리 외로워도 슬퍼도 울면 안되는거야. 지수는 로즈 오프닝을 깨우친 들장미 소녀니까. 하하하!”

“들장미 소녀요? 하아... 네에...”

어린 지수는 농담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하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웃으며 대답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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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델로 소설가, 공인 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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